"안부장인(案付匠人)"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0:4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안부장인 |
한글표제 | 안부장인 |
한자표제 | 案付匠人 |
상위어 | 관공장(官工匠) |
동의어 | 官工匠, 관장(官匠) |
관련어 | 경공장(京工匠), 외공장(外工匠), 공장세(工匠稅) |
분야 | 경제/재정/역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윤용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안부장인(案付匠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7년 2월 27일 |
장인의 명부인 장적에 등록된 관공장.
내용
조선전기 전문적 수공업자인 공장(工匠)은 관영 수공업 체제 아래 관부에 예속되었다. 공천(公賤), 혹은 다른 신역을 지지 않은 양인 농민 등을 장인으로 편제하였다. 이들은 신량역천층(身良役賤層)에 속해서 양인 최하층을 이루었다. 공장은 다시 공조를 비롯한 경아문(京衙門) 소속의 경공장과 각 도 감영 및 군현 소속의 외공장으로 나뉘었다. 안부장인인 경공장과 외공장은,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앙에는 30개 관아에 약 2,800명의 안부장인인 경공장이 129종의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고, 지방에는 약 3,700명의 안부장인인 외공장이 27종의 물품을 생산하도록 규정되었다. 외공장 가운데 1,150명이 경상도에 소속되었다.
경공장에는 무기·직물·사기 제조 분야의 수공업자가 많았고, 대부분 전업적 수공업자였다. 이들은 복무 시간 외에는 사적인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교서관(校書館)의 경우 146명의 안부장인이 소속되었다. 외공장에는 종이·무기·목기·가죽 제품·철물 등을 제작하는 자가 많았다. 야장(冶匠) 외에는, 대개 농업을 함께 경영한다는 점에서 가내부업적인 수공업 생산에 종사한 것이었다. 안부장인인 관공장은 관의 수요에 따라 책임량을 제작하였다. 품질·규격에 엄격한 제한이 따랐다. 관공장의 공적인 제작 활동은 신역(身役)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많은 통제를 받았다.
안부장인인 관공장은 납세 의무를 졌다. 공역일(公役日)을 제외하고, 사적으로 영위한 생산 활동에 대한 과세였다. 경공장의 공장세(工匠稅)는 중앙의 호조·공조에서 징수하였고, 외공장의 공장세는 지방은 감영이나 군현에서 징수하였다. 16세기 이후 장인들의 신역도 물납세화되면서 장인가포(匠人價布)를 부담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추세를 보였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장인의 인신적 예속 관계는 현저히 완화되었다. 정조대에 편찬된 『대전통편』에서는 장적의 제도가 소멸되었으므로 모든 역사에는 사공(私工)을 고용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명시하였다. 이 같은 새로운 변화와 관련하여, 관의 토목공사 등에서도 기술 노동력의 소유자인 장인들이 모군과 같은 자유로운 임노동자로서 고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띠게 되었다.
용례
御朝講 (중략) 獻納魚泳濬曰 (중략) 其疏曰 工役荐興 重斂繁刑 皆足以致災 近者 年運凶荒 兩界則再經天使 民未蘇復 加之以歲凶 如此之時 則所當休息勞來 而義州築城 臺諫方啓其不可 而乃以大臣之言强爲之 當時 兵使及監役守令之出入 凡支供等事 不能當之 而築之未久 遽已頹覆 是無益而有損也 下三道 雖曰小稔 而輒加稅賦 下民之無知者 豈能知國穀之虛耗 而加賦之意耶 以如此嗷嗷之時 乃設行營等鎭 雖曰役以當領水軍及各官案付匠人 而匠人則名存實無 必調發民間 弊亦甚多 (하략) (『중종실록』 17년 2월 27일)
참고문헌
- 姜萬吉, 『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 姜萬吉, 「手工業」, 『한국사』 10, 국사편찬위원회, 197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