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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북한산성에 주둔한 승군(僧軍)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아보던 우두머리 승려.

개설

북한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도성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도성 외곽에 성을 쌓자는 의견에 따라 남한산성과 함께 축성되었다. 이때 전국의 승려들이 공사에 많이 동원되었는데, 승려들은 축성 공사가 끝난 뒤에도 매년 여섯 차례 번갈아 교대하면서 산성을 방어하였다. 승군의 조직은 총융청의 군사 조직을 기초로 편제되었다. 북한승장(北漢僧將)은 승영(僧營)의 우두머리인 총섭(摠攝)의 지휘 아래 북한산성의 승군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

내용

북한산성은 1659년(효종 10)에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했으며, 이후 1711년(숙종 37)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시행하여 둘레 7,620보의 석성을 완성하였다. 축성은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삼군문(三軍門)이 분담하여 6개월 동안 진행하였다. 그 당시 승려 성능(聖能)은 축성에 참여할 승려를 모집하였고, 축성 이후에는 산성 내의 승군을 통솔하였다.

팔도도총섭이었던 성능이 1745년(영조 21)에 간행한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승군의 주둔지인 승영에는 팔도도총섭 겸 승대장(僧大將) 1명, 북한산성 내 11개 사찰의 승장 각 1명 및 수승(首僧) 각 1명, 각 도에서 교대로 동원된 의승군(義僧軍) 350명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1725년(영조 1)에 찬술된 「삼각산태고사중창상량기(三角山太古寺重創上樑記)』에는 북한산성 승영 사찰의 승장과 그 품계가 수록되어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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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장은 산성 내 승군의 최고 지휘관인 도총섭이나 총섭의 바로 아래 직급이었다. 승장의 아래로는 사찰마다 1명씩의 수승과 각각 배정된 승군이 있었다. 결국 승장은 북한산성 내의 독립된 군영이라 할 수 있는 11개 사찰을 각각 통솔하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한편 승장은 왕이 산성에 행차할 때는 호위 임무도 담당하였다. 1760년(영조 36)에 왕이 행차하는 중에 잠시 머물러 낮수라를 드는 주정소(晝停所)에 도착했을 때 북한승장이 승군을 거느리고 산성의 남문 밖에서 맞이하였고, 환궁할 때도 역시 목적지에 있었다(『영조실록』 36년 9월 30일).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승군 제도가 1894년(고종 31)부터 1896년(고종 33)까지 추진된 갑오개혁으로 인해 폐지된 것으로 미루어, 승장 역시 이때 소멸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남한지(南漢誌)』
  • 『북한지(北漢誌)』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김갑주, 「정조대 남북한산성의승번전의 반감」, 『소헌남도영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태학사, 1984.
  • 김갑주, 「남북한산성의승번전의 종합적 고찰」, 『불교학보』25,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88.
  • 여은경, 「조선후기 산성의 승군총섭」, 『대구사학』28, 대구사학회, 1987.
  • 조명기, 「조선후기 불교」, 『한국사론』4, 국사편찬위원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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