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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7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봉수에서 실제로 번(番)을 서지 않는 대신, 번을 서는 봉수군(烽燧軍)의 군무(軍務)와 생활을 보조하던 보인(保人).

개설

조선시대 봉수에는 책임자인 감관(監官), 봉수 근무자인 봉수군, 봉수군의 경제적인 보조자인 봉군보가 소속되어 있었다. 봉수 한 곳에는 감관 5명, 봉졸 20명, 봉군보 75명 등 총 100명이 소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봉수에 딸린 토지를 두어 경비를 충당하게 한 데 비해, 조선시대에는 봉수에서 번을 서는 봉수군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봉군보를 배정하였다. 봉군보는 봉수군과 마찬가지로 봉수 인근의 백성들로 구성되었는데, 봉수군 1명당 평균 3명의 봉군보가 딸려 있었다.

담당 직무 및 구성

조선시대의 국가 기간 통신망인 봉수의 실질적인 운용 주체는 봉수군이었다. 이들은 봉수에 상주하며, 매일 평상시에는 1기의 봉화를, 전란과 같은 위급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5기의 봉화를 올려야 했다. 따라서 봉수에서 번을 서는 이들 봉수군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봉수에 속한 토지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봉수에 필요한 물자의 공급과 시설의 보수 및 유지를 위한 비용 등을 충당하기 위해 봉군보를 배정하였다.

봉수군에 대한 봉군보의 배정은 고을의 형편에 따라 달랐다. 『영남읍지(嶺南邑誌)』의 「문경읍지(聞慶邑誌)」 군액(軍額) 항목에는 봉수군 50명에 봉군보가 15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같은 책의 「문경부사례책(聞慶府事例冊)」 군액에 따르면, 선암참봉수(禪巖站烽燧)와 탄항참봉수(炭項站烽燧)에 똑같이 봉수별장 2명과 봉수군 25명, 봉군보 75명씩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봉수군 1명당 3명씩의 보가 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인동부읍지(仁同府邑誌)」 봉수에는 4명의 봉군보가, 『호남읍지(湖南邑誌)』의 「나주목여지승람(羅州牧輿地勝覽)」 봉수에는 2명의 봉군보가 배정되었다.

참고문헌

  • 『영남읍지(嶺南邑誌)』문경읍지(聞慶邑誌) 군액(軍額).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인동부읍지(仁同府邑誌).
  • 『호남읍지(湖南邑誌)』나주목여지승람(羅州牧輿地勝覽).
  • 김주홍,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2011.
  • 김주홍, 『朝鮮時代의 內地烽燧』,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聞慶 炭項烽燧』,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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