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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7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춘추관(春秋館)에서 시정기(時政記)를 기록하던 정6품 이하의 관직.

개설

춘추관의 정6품에서 정9품까지의 관직으로, 시정사의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을 담당한 관리이다. 예문관의 전임(專任) 관원으로 봉교·대교·검열 등 전임 사관(史官)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국가의 공식 기록을 담당하였던 사관은 전임 사관과 겸임 사관으로 구분되는데, 후자는 의정부를 비롯하여 승정원·홍문관·예문관·사간원·시강원·승문원·종부시 등의 해당 품계 관원이 당연직으로 겸임하였다.

이 중 예문관의 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이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여 매일 매일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이들 8명의 기사관을 ‘사관(史官)’ 혹은 ‘한림(翰林)’이라고 하였다. 연산군 때 녹고관(錄考官)이라 개칭하였으나, 중종 즉위 초에 기사관으로 환원되었다. 정조 때 규장각이 설치되면서 규장각 6품 이하의 관원도 당연직으로 겸임하였다. 고종 즉위 초에 사간원의 관원이 기사관을 겸임하는 경우는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사관을 의미하는 용어는 한림·사관·사한·사신 및 예문관의 참외관 즉 봉교·대교·검열, 그리고 기사관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좌사기언(左史記言) 우사기사(右史記事)’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기사관은 기언관과 함께 좌·우사로서 왕의 언행을 직접 기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본문에서 기사관으로 칭해진 인사 대부분은 전임 사관이었다. 이들 기사관은 시정사의 기록과 당대사인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을 담당한 사관과 동일하게 인식되었다.

사관이 처음 설치된 것은 고려시대로, 예문·춘추의 2관으로 나누어 시정의 기주(記注)를 담당하게 했다. 조선 태조 때 두 기관을 합쳐 예문춘추관을 설치했다가 뒤에 나누어 춘추관과 예문관으로 운영하였다. 춘추관에는 영사 1명, 겸지사·동지사 각 2명, 수찬관 7명, 편수관·기주관·기사관 등을 두었다. 이 가운데 홍문관의 직제학에서 정자까지, 예문관의 봉교에서 검열까지, 승정원의 주서, 승문원의 판교, 종부시 정 등은 모두 본 품계를 갖고 편수·기주·기사관을 겸했다. 또 사헌부의 집의에서 지평까지와 사간원의 당하관 1명이 기사관을 겸하였다.

조선초기에는 기사관이 기록하는 일기가 대단히 소략하여 관원들의 성명과 출근·결근 여부만을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나 뒤에 시정기와 함께 참판 이상의 신하가 죽으면 행장과 그에 대한 평가를 서술하기도 하여 임무가 막중해졌다. 이로 인해 이수광(李睟光) 같은 이는 사관의 역할이 재상의 임무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하였고,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李爾瞻) 일파에 의해 비판적인 사관들이 강제로 교체당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기사관을 설치·운영한 배경에는 국가에서 시행한 공식적인 정치·행정사는 당연히 기록되어야 하며, 기록은 반드시 후세에 전해져 교훈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공론화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변천

1454년(단종 2) 『세종실록』 수찬관에게, 그리고 1472년(성종 3) 『예종실록』수찬관에게 상급(賞給)한 기사가 있다. 여기에서 기주관과 기사관, 특히 기사관에게는 다른 직임과 달리 1자급(資級)씩 승진시키는 상을 내렸다. 연이어 편찬된 『세조실록』의 상급에 이어 『예종실록』편찬관에게도 가자(加資)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논의도 제기되었으나, 성종은 “똑같은 선왕의 실록인데, 한 번은 상을 주고 한 번은 상을 주지 않는 것이 어찌 내 마음에 합당하겠는가? 전례를 상고해보아도 오히려 족하다.”라고 대답함으로써, 기사관 즉, 사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과 각 『조선왕조실록』마다 별도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춘추관은 시정의 기록을 맡으며 모두 문관으로 임용하되 다른 관사의 관원이 겸임케 하였다. 수찬관 이하는 승정원·홍문관의 부제학 이하, 정4품 의정부 사인·정5품 검상·정7품 예문관 봉교 이하 및 시강원 당하관 2명·종2품 사헌부 집의 이하, 사간원·승문원·종부시·육조의 당하관 각 1명이 겸한다고 규정되었다.

춘추관은 『경국대전』에 정3품아문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정3품 당상관인 수찬관이 그 장관이었으나 역사 편찬은 중요한 일이므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고위 관료가 겸임하고 있던 동지춘추관사 이상 영춘추관사가 크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수찬관은 평상시 역사의 기록을 담당하는 실질적 책임자였으나 실제로는 삼정승 등 고위 관료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관서와 마찬가지로 춘추관의 관제는 당상과 낭청으로 구분되었다. 당상관은 3품의 상위 관품까지를 지칭하며 낭청은 6품직 이하의 실무를 담당하는 관직의 총칭이다. 당상은 의자에 앉아 주관자로서의 임무를 맡았고, 중요한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하였다. 낭청은 평지에 앉아 회의에 참석했으며, 실무 기능을 맡았다. 이에 따라 춘추관의 관원을 지칭할 때는 당상과 낭청이라고 칭하였다.

정사가 이루어지는 모든 자리에 입시하여 왕의 언행을 기록하는 기사관은 물론, 견문에 의하여 사초(史草) 또는 사고(史稿)를 쓰는 기주관·편수관·수찬관 역시 사관으로 인정되었다. 즉 넓은 의미로는 당대사의 편찬에 참여하였던 9품 이상 춘추관의 전 관료를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사관의 공식적인 명칭은 예문관 봉교 이하의 8명을 지칭하였다.

겸춘추는 자신이 속한 기관의 일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춘추관의 기능, 즉 기록을 남기는 낭청직 관원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사관은 좁은 의미의 전임 사관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없고, 사관의 기능을 수행한 영사 이하 기주관과 편수관 등 시행사를 기록하고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참여한 모든 겸춘추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의의

『경국대전』 「이전(吏典」 ‘춘추관’조에 의하면, 춘추관의 관원은 영의정이 겸임하는 정1품의 영사 1명과 좌·우의정이 겸임하는 감사 2명, 정2품의 지사 2명, 종2품의 동지사 2명, 정3품 당상의 수찬관 7명, 정3품 당하에서 종4품의 편수관, 정·종5품의 기주관, 정6품 이하 정9품까지의 기사관 등으로 편성한다는 규정이 있다.

정6품에서 정9품까지의 인사로 춘추관 혹은 실록청에 보임되었던 기사관은 사관과 동일한 의미로 『조선왕조실록』에 쓰였다. 한림·사관·사한·사신 및 예문관의 참외관 즉 봉교·대교·검열, 그리고 기사관 등이 그것이다. ‘좌사기언 우사기사’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기사관은 기언관과 함께 좌·우사로서 군주의 언행을 기록하였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본문에 기사관으로 칭해진 인사 대부분은 전임 사관이었다.

1478년(성종 9)의 기사에 기사관이라고 표기되었던 안윤손(安潤孫)은 1476년(성종 7) 등과(登科) 후 사관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성종실록』 9년 4월 24일), 1482년(성종 13)의 기사관신숙근(申叔根)은 그 전해에 등과 후 사관직을 수행 중이었다(『성종실록』 13년 4월 23일). 이와 같이 전임 사관을 기사관이라고 칭한 것은 기능과 실제 활동 내용이 동일했기 때문이다.

실록청에 편성되었던 직임 중 사관으로 참여한 것은 기사관이었으며, 이는 ‘기사관=사관’이라는 등식이 틀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국가의 시행사는 반드시 모두 기록되어야 하고, 후대의 교훈이 되어야 한다는 시대사조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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