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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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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병마절제사 |
한글표제 | 병마절제사 |
한자표제 | 兵馬節制使 |
관련어 | 도병마사(都兵馬使), 병마단련사(兵馬團鍊使), 병마사(兵馬使), 부윤(府尹)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훈표 |
관품 | 정삼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3년 3월 27일, 『태종실록』 15년 3월 25일,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4년 1월 3일, 『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
조선시대 지방의 주요 거진(巨鎭)에 설치되었던 정3품 무반직.
개설
조선초기에는 양계(兩界)의 국경 지역에 설치되었던 군익도(軍翼道)의 중심 고을 수령이나 4군 6진의 진장(鎭將)에게 제수되었던 관직이다. 그 연원인 도병마사 등과 같이 수령을 겸임하면서 일반 행정 업무와 군사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행정 업무가 중심이었다.
세조 때 군익도 체제를 전국에 확대하고 진관 체제를 구축하면서 중익 수령이나 주진(主鎭)의 당상 수령이 겸하게 되었다. 이로써 군대 통솔보다는 행정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단 2곳에만 설치되었고 정3품이면서도 종2품인 부윤이 겸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 이후 설치된 곳의 변동은 있었으나 품계나 성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담당 직무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양계 지역의 수령은 그 직책의 품계에 따라 군익도 좌·우·중익의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등을 겸임하며 군대를 지휘했다. 그런데 그 연원인 병마사와 도병마사 등의 영향을 받아 군 통솔에 더 중점을 두었다. 특히 각 도의 최고 군 통솔권을 행사했던 병마도절제사의 시절부터 그 지시를 받고 군사를 실제로 지휘했다. 이에 따라 국경 지역 군익도의 중심 고을 수령이나 4군 6진의 진장이 그 직함을 띠고 있었다.
조선 건국 후 양계에 처음으로 도병마사가 파견된 것은 1394년(태조 3)으로, 그들은 서북면의 경우 익군(翼軍) 편성의 중심지였던 의주, 강계 등으로 보내졌다(『태조실록』 3년 3월 27일). 간간히 병마사·절제사의 칭호와 혼용되기도 했다. 임명되는 사람의 품계와 관련이 있는 듯하나 정리가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군익도 체제가 점차 제자리를 잡아가면서 1415년(태종 15) 중외의 일부 직제와 행정 구획이 개편되었다. 이때 성달생(成達生)을 우군총제로 경성병마절제사와 판경성군사를, 신열(辛悅)을 우군동지총제로 삭주도병마절제사와 판삭주도호부사를 겸하게 하였다(『태종실록』 15년 3월 25일). 이를 계기로 도병마사 등이 병마절제사로 바뀌었으며 해당 지역의 수령을 겸임하게 되었다. 원형은 전부터 있었으나 본 체제로 구축되었던 것은 그 당시부터였다. 함길도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게 대개 진(鎭)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직책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전국으로 군익도 체제가 확대되어, 심지어 내지에도 각 도에 몇 개씩 거진이 설치되고, 근방의 여러 고을을 좌·우·중익에 분속시켰다. 아울러 중익수령(中翼守令)의 직함은 ‘모도모진중익병마절제사(某道某鎭中翼兵馬節制使)’라 일컫고, 당상관이 아니면 첨절제사라고 부르게 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8년에 다시 제도의 좌·우·중익을 혁파하여 진을 두되, 주진(主鎭) 당상관(堂上官)을 ‘모주진병마절제사(某州鎭兵馬節制使)’로 부르게 했다(『세조실록』 4년 1월 3일). 이로써 병마절제사의 위치와 역할이 분명해졌다. 병마절제사는 각 도별로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아서 군대를 통솔하나 그보다 당상 수령으로서 주진에 해당하는 거읍(巨邑)의 행정을 우선시했다. 점차 후자의 중요성이 커졌다.
변천
1466년(세조 12) 관제를 개정하면서 병마단련사를 모진도병마절제사(某鎭道兵馬節制使)로 고쳤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원래 단련사는 수령을 겸하면서 군대 통솔보다는 민사 행정에 더 치중했던 관직이다. 이로 인해 행정 관리 면모가 더 두드러졌다. 그런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정원 2명으로 정3품직으로 설치되었다. 경상도의 경주진(慶州鎭)에 두어졌는데 좌도(左道)에 속하게 했다. 전라도에는 전주진(全州鎭)에 두어졌다. 각각 경주부윤(慶州府尹)과 전주부윤(全州府尹)이 겸하게 했다. 영흥부(永興府)와 평양부(平壤府)에도 부윤이 설치되었으나 관찰사가 겸했기 때문에 병마절제사의 직함이 주워지지 않았다.
이로써 1466년 이후에 그에 관한 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국방상의 요충지에 설치되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관찰사가 겸하지 않았던 경주·전주부윤에게만 주워졌다. 본래 부윤과 관찰사는 종2품으로 품계가 같았다. 그런데 경상도와 전라도관찰사는 모두 종2품인 병마절도사를 겸하였다. 만약 부윤이 관찰사와 똑같이 병마절도사급을 겸한다면 지휘와 위신에 혼란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이에 부윤에게는 한 등급 낮은 정3품 병마절제사를 제수함으로써 서열을 분명하게 했던 것이다.
『속대전(續大典)』에서도 정원 2명으로 정3품직이었다. 경상도 경주진의 경우에는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전라도의 경우 관찰사가 전주부윤을 겸하면서 삭감되었다. 그 대신 평안도의 의주목이 의주부(義州府)로 승격되면서 의주부윤이 임명되고 그로 하여금 병마절제사를 겸하게 했다. 이때 경기도의 광주(廣州)도 부(府)로 승격했으나 그 부윤은 종2품의 병마방어사(兵馬防禦使)를 겸하게 했다.『대전통편(大典通編)』에 들어와서 비로소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하여금 병마절제사를 겸하게 했다. 이로 인해 정원이 3명으로 늘었으나 품계는 여전히 정3품이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광주부윤이 유수(留守)로 승격하면서 병마절제사를 삭감하였다. 이로 인해 경주진과 의주진만 남아서 정원이 2명으로 줄었으며 품계는 그대로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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