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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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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병마첨절제사 |
한글표제 | 병마첨절제사 |
한자표제 | 兵馬僉節制使 |
동의어 | 병마첨사(兵馬僉使) |
관련어 | 첨사(僉使), 첨절제사(僉節制使)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윤훈표 |
관품 | 종삼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6년 6월 23일, 『세조실록』 4년 1월 3일 |
조선시대 각 도에 설치된 거진(巨鎭)의 장수로 병마(兵馬)를 통솔했던 종3품의 서반 외관직.
개설
1397년에 도 단위 군사 책임자였던 남방 지역의 도절제사(都節制使)를 폐지하고 변진(邊鎭)을 설치하여 진군(鎭軍)을 두면서 그들을 통솔하고자 파견하였던 것이 시초였다. 세종 때 도 단위 군사 책임자로 3품관이 임명되면 병마첨절제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곧 이러한 명칭이 불합리하다며 폐지하면서 변진의 통솔자로 규정되었다. 1457년 진관(鎭管) 체제로 전국의 군사망이 편성되자 내륙에도 거진이 생기며 파견되었는데, 주변의 수령을 겸하였다. 남방에 두었던 것들은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양계(兩界)에 파견되었던 것들만 제대로 기능하였다.
담당 직무
1397년(태조 6) 당시 도 단위 군사 책임자였던 남방 지역의 도절제사를 폐지하고 변방의 군영인 변진을 설치하면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었던 것이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시초가 되었다. 이때에는 진에 소속된 진군을 통솔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그로부터 1년 뒤 도절제사가 다시 회복되었으나 첨절제사에 큰 변화는 없었다. 연해 요충지에 설치된 진에 파견되어 진군을 통솔하여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는 일이 중요했으며 부근의 수령직도 겸하여 군정에 관한 사무도 함께 처리했다. 그런데 도 단위 군사 책임자로 양부(兩府), 즉 동반의 의정부와 서반의 중추부 이상의 고관이 아닌 3품관이 임명되면 도절제사라 하지 않고 ‘병마첨절제사’로 부르도록 했다. 하지만 1424년(세종 6)에 이것이 불합리하다며 도절제사로 통일해서 호칭하도록 했다(『세종실록』 6년 6월 23일). 이를 계기로 병마첨절제사는 도절제사 휘하의 진을 통솔하는 직위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인 동계와 평안도 지역인 북계의 양계 변진에도 파견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충청도에 2곳, 순성진(蓴城鎭)과 남포진(藍浦鎭)에 파견되었다. 전라도의 4곳에 보내졌는데, 옥구현(沃溝縣), 부안현(扶安縣), 무장현(茂長縣), 조양진(兆陽鎭) 등이다. 경상도에는 5곳에 보내졌는데, 울산진(蔚山鎭), 영일진(迎日鎭), 동래진(東萊鎭), 영해진(寧海鎭), 사천진(泗川鎭) 등이다. 황해도에는 4곳, 풍천진(豊川鎭), 장연진(長淵鎭), 옹진진(甕津鎭), 강령진(康翎鎭)에 설치되었다. 강원도의 2곳인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간성군(杆城郡)에 보냈다.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편성되어 내륙에 설치된 거진을 방위의 주요 거점으로 삼는 새로운 국방 체계가 편성됨으로써 그동안 주로 변진에 파견되었던 첨절제사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듬해 1월에 각급 고을의 수령들이 겸대하는 군사 직함이 규정되었는데 거진수령으로 3품이면 모주진병마첨절제사(某主鎭兵馬僉節制使)로 부르게 했다(『세조실록』 4년 1월 3일). 즉 내륙의 거진에도 품계에 따라 첨절제사가 파견된 것이다.
하지만 진관 체제의 편성으로 내륙의 방위가 갖춰짐으로써 변진의 가치는 줄어들게 되었다. 더구나 왜구의 침입도 드물게 되자 남방 육군의 변진과 그에 파견된 첨사의 본래 기능은 거의 정지되었다. 1457년 이후에는 북방의 양계에 파견된 것들만 제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변천
『경국대전』에 의하면 종3품으로 경기도 4곳에 설치되었는데 모두 수령이 겸대했으며 나머지 도들도 모두 동일했다. 충청도 4곳에 두었다. 경상좌도에 2곳, 경상우도에 3곳 두었다. 전라도 4곳에 두었다. 황해도 2곳에 두었다. 강원도 3곳에 두었다. 영안남도(永安南道: 현 함경남도)에 4곳, 영안북도(永安北道: 현 함경북도)에 11곳 두었다. 그중에서 훈융, 동관, 고령, 유원, 미전, 혜산은 경관직으로 겸임하게 했다. 평안도에는 16곳을 두었다.
그 뒤에 설치 지역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대전회통』에서 최종적으로 정비되었는데, 경기도 10곳, 충청도 3곳, 경상좌도 2곳, 경상우도 5곳, 전라도 4곳, 황해도 1곳, 강원도 3곳, 함경남도 9곳, 함경북도 16곳에 두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김순남, 「진관체제의 확립과 지방군」, 『한국군사사 5 조선전기Ⅰ』, 육군본부, 2012.
- 오종록, 「조선초기의 병진방위와 병마첨사·만호」, 『역사학보』 123,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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