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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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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연관 |
한글표제 | 경연관 |
한자표제 | 經筵官 |
상위어 | 경연(經筵), 경연원(經筵院), 경연청(經筵廳) |
하위어 | 검토관(檢討官), 경연원경(經筵院卿), 대학사(大學士),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부시강(副侍講), 부학사(副學士), 시강(侍講), 시강관(侍講官), 시독(侍讀), 시독관(侍讀官), 영경연사(領經筵事), 지경연사(知經筵事), 참찬관(參贊官), 특진관(特進官), 학사(學士) |
관련어 | 홍문관(弘文館), 집현전(集賢殿)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김경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연관(經筵官)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세조실록』 2년 6월 6일, 『세조실록』 6년 5월 22일 |
조선시대에 왕의 학문 지도와 치도(治道) 강론을 위하여 설치된 경연에서 활동한 관직.
개설
경연관(經筵官)의 직제는 고려 공양왕 때 서연(書筵)이 경연으로 승격되면서 개편되었는데, 영사 2명, 지사 2명, 동지사 2명, 참찬관 4명, 강독관 2명, 검토관 3명 등을 두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과 성종 때 다시 개편되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경연관도 다른 관서의 관원과 마찬가지로 당상관과 낭청(郎廳)으로 구성되었다. 당상관은 영사 3명, 지사 3명, 동지사 3명, 참찬관 7명 등이었다. 영사는 삼정승이 겸하고, 지사와 동지사는 정2품관과 종2품관 중에서 각각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였다. 참찬관은 6명의 승지와 홍문관 부제학이 겸직하였다. 낭청은 정3품 당하에서 종4품까지의 시강관, 정5품에서 종5품의 시독관, 정6품에서 종6품의 검토관, 정7품의 사경, 정8품의 설경, 정9품의 전경 등이었다.
성종 말년에는 특진관을 두었는데, 1·2품의 대신 중에서 임명하였으며 정원은 따로 정하지 않았다. 낭청으로는 시강관·시독관·검토관을 두었는데, 모두 홍문관 관원이 겸임하였다. 시강관은 직제학·전한·응교·부응교가 겸했고, 시독관은 교리·부교리가 겸했으며, 검토관은 수찬·부수찬이 겸하였다. 사경, 설경, 전경 등은 참외직(參外職)으로, 홍문관의 박사, 저작, 정자가 각각 겸임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벼슬하지 않는 유학자를 경연관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담당 직무
경연관은 왕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고 치도를 논의하는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모두 겸직으로 운영되었다. 학문과 인품이 탁월한 문관에게 겸임시킨 명예로운 관직으로, 여러 가지 특별 대우를 받는 청화직(淸華職) 가운데 하나였다. 경연관을 선정할 때는 대신들과 이조의 당상관들이 빈청(賓廳)에 모여 협의한 뒤 후보자를 초록하여 상주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경연관 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기초로 하였다. 조선왕조 개창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 관제를 제정할 때 고려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때 규정된 경연관은 시중 이상의 영사 1명, 정2품 지사 2명, 종2품 동지사 2명, 정3품 참찬관 5명, 종3품 강독관 4명, 정4품 검토관 2명, 정원 미상의 정5품 부검토관 등이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20년(세종 2)에는 집현전을 설치하고 집현전 관원들에게 경연관을 겸하도록 하는 전임 경연관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1438년(세종 20)에는 정원을 20명으로 조정하여 10명은 경연관을, 나머지 10명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서연관(書筵官)을 겸하도록 하였다.
그 뒤 세조 때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경연관 겸직제에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1456년(세조 2)에는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집현전이 혁파되면서 경연 역시 폐지되었다(『세조실록』 2년 6월 6일). 경연을 전담한 부서인 집현전이 혁파됨에 따라 1460년(세조 6)에는 영경연사, 지경연사 등의 경연관도 일시적으로 없어졌다(『세조실록』 6년 5월 22일). 이후 학술 및 언론 기관의 기능을 갖춘 홍문관이 1478년(성종 9)에 설치되면서 집현전의 기능을 회복하였고, 경연관 제도 역시 다시 운영될 수 있었다. 경연관은 이처럼 몇 차례의 정비 과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체계화되었는데, 이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경연관 32명은 모두 겸관이었다. 그중 영사는 세 의정이 겸하였고, 참찬관 이상은 중신(重臣) 가운데서 선임하였다. 시강관 이하는 홍문관 관원들이 겸직하였다. 또 문·무 2품 이상의 관원 중에서 별도의 경연특진관을 선임하기도 하였다. 영사·지사·동지사 등 2품 이상의 고관이 겸하는 관리직과, 참찬관 등 3품 이하의 중하위 관원들이 겸하는 실무직으로 겸관 운영의 실체를 살필 수 있다. 참찬관 이상의 관원이 16명이고, 시강관 이하 전경까지의 관원이 16명으로, 당상관과 당하관의 수를 동일하게 편성한 것 역시 주목된다. 이는 관리직과 실무직의 기능과 역할을 동일하게 중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대체로 고위 겸직은 의정·찬성·판서·참찬 등 의정부와 육조의 고관들이 겸하였는데, 이는 권력의 집중 현상과 조선 관료 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후 1486년(성종 17) 5월에 특진관 제도를 시행해 재상 중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한 사람을 선임하여 경연에 참석하도록 하였고, 이후 육조·한성부의 2품 이상을 지낸 관원으로 선임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특진관 제도는 연산군 때 일시 정지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다시 정례화되었다. 인조대 이후 산림(山林)들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을 위해 세자시강원에 찬선·진선·자의 등 이른바 산림직이 개설되었다. 이들은 세자의 서연에 참석하는 이외에도 경연에도 참석하였다.
1894년(고종 31) 관제 개정 때 홍문관과 예문관이 합해져 경연청(經筵廳)이 설치되면서 대학사 1명, 학사 1명, 부학사 1명, 시강 2명, 시독 2명을 두었다가 다음 해 1895년(고종 32)에 경연청을 경연원(經筵院)으로 개편하면서 칙임관급의 경(卿) 1명과 시강(侍講) 1명, 주임관급의 부시강(副侍講) 1명, 판임관급의 시독(侍讀) 4명을 두었다. 1897년 경연원은 홍문관으로 개편되었는데, 1903년(고종 40) 「궁내부관제 개정건」을 발표하면서 홍문관에 따로 칙임관급의 경연관을 두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성무, 『조선초기 양반연구』, 일조각, 1981.
- 권연웅, 「성종조의 경연」, 『한국문화의 제문제』, 1981.
- 권연웅, 「세종조의 경연과 유학」, 『세종조문화연구』 1, 1982.
- 권연웅, 「조선 영조대의 경연」, 『동아연구』 17, 1989.
- 권연웅, 「조선초기 경연의 재이론」, 『역사교육논집』 13·14합, 1990.
- 권연웅, 「조선초기 경연의 간쟁론」, 『경북사학』 14, 1991.
- 남지대, 「조선 초기의 경연」, 『한국사론』 6, 1980.
- 이상옥, 「경연에 나타난 경학과 제왕」, 『우석대논문집』 4, 1970.
- 이영춘, 「조선시대의 겸직제도」, 『청계사학』 4, 1987.
- 지두환, 「조선시대 경연관 연구」, 『한국 역사상 관료제 운영시스템에 관한 연구』, 국민대 출판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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