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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4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특별히 동원된 군대를 총지휘하는 임시 관직.

개설

고려말 외적의 침입이 잦아 군대 출동이 빈번해지자 그 총지휘관 임명이 상설화되었다. 조선에서는 성종 때 건주야인(建州野人)으로 불리던 남만주 지역의 여진족 정벌을 계기로 도원수(都元帥) 임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도원수는 원정군의 지휘뿐만 아니라 변방 방비도 주도하였으나 주된 임무는 외침을 방어하기 위해 동원된 부대를 통솔하는 일이었다. 임진왜란 중에는 장기간에 걸쳐 임명되기도 했다. 대개 2품 이상의 문관 출신이 도원수가 되고 무장은 부원수가 되었는데, 전자는 전체를 통솔하고, 후자는 실제 전투를 책임졌다.

담당 직무

1) 국외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479년(성종 10)에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주야인을 정벌하기 위해 출동한 군의 총지휘를 맡았던 평안도도원수윤필상(尹弼商)이었다. 평안도절도사를 부원수로 삼아 정벌하되, 그 이하의 관원과 본도(本道)의 관찰사와 수령 등도 모두 그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성종실록』 10년 11월 18일). 도원수는 원정군을 총지휘할 뿐만 아니라 평안도 지역의 모든 수령이나 변장 등도 그의 지시에 복종하게 함으로써 방면(方面) 사령관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였다. 이는 원정 사업의 전권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의 요청으로 당시 만주 일대에서 흥기하고 있던 후금(後金)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한 총지휘관으로 강홍립(姜弘立)이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10년 윤4월 23일). 그는 총령대장 부원수에 임명된 평안도절도사김경서(金景瑞)를 비롯한 1만 3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1619년 2월에 창성에서부터 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갔다. 같은 해 3월에 마침내 명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심하(深河)에서 후금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런데 강홍립은 문과에 급제한 전형적인 문관 출신이었다. 이는 본디 부원수가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아가고 도원수는 뒤에서 절제하고 응원했던 기본 원칙에서 비롯된 인사였다. 그러므로 부원수는 반드시 무관 장수를 뽑아 보내고 도원수는 문관 출신의 재상을 임명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7월 6일). 이는 강홍립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종 때의 윤필상이나 허종(許琮)의 경우도 그러했다.

2) 외적의 방어를 위해 출동하는 군대의 총지휘관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면서 총지휘관으로 처음에는 성희안(成希顔)을 지명하여 임명했다. 그러나 그가 병이 심하고 변방의 일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해서 유순정(柳順汀)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희안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제수하여 한양에 계속 머물면서 조치하게 하였다(『중종실록』 5년 4월 13일). 이처럼 군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것은 도원수이며 중앙에서 전체를 통솔하는 것은 도체찰사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포왜란 때와 비슷한 체제를 구축하였다. 선조는 북방으로 피난하면서 전쟁을 직접 이끌 최고 명령권자인 도체찰사와 전투 지휘의 최고 책임자인 도원수를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게 하였다. 대체로 전자에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의정(議政) 중에서 겸하게 하였으며, 후자에는 2품직에서 군사 능력이 있는 사람을 지명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에는 대체로 문관들이 임명되었다. 워낙 장기전이었고 국제 전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인물들이 임명되었는데, 초기의 도체찰사로는 좌의정인 유성룡(柳成龍)이 대표적이다. 첫 도원수로는 상중에 있던 김명원(金命元)을 임명하고 신각(申恪)을 부원수로 삼았다(『선조실록』 25년 4월 29일). 김명원은 문관 출신이며 2품관이었고 신각은 무장이었다.

3) 변방 방비 업무와 내란 진압군의 총책임자

국외 원정 직후, 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변방의 방위력을 짧은 기간에 강화해야 할 때 종종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1491년(성종 22) 건주위(建州衛) 침입에 관한 정보가 명나라 측에서 전달되자 방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서는 평안도 관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이에 성종이 이조 판서를 도원수로 임명하고 유능한 무장을 인솔해 가서 만반의 조치를 취하게 하였다. 이에 이극균(李克均)을 서북면도원수로 삼고, 평안도절도사오순(吳純)을 부원수로 삼았다(『성종실록』 22년 5월 24일). 실질적으로 군대를 거느리지 않았지만 방위력을 효율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도원수를 파견했다.

한편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던 경우로는 1624년(인조 2)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반란 때 임명된 장만(張晩)을 들 수 있다(『인조실록』 2년 1월 24일). 그는 이미 그 전해에 도원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진압차 출동한 부대를 지휘하지는 않았다. 이미 동원된 부대를 거느리고 진압 작전을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난을 일으킨 이괄이 부원수의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진압군 책임자는 도원수가 되어야 했다.

변천

1) 수용과 원정군 지휘관의 시기

고려 충렬왕 때 일본 원정군을 지휘했던 김방경(金方慶)에게 원나라 세조가 제수한 이래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 인물이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초기에 잠깐 동안 임명되다가 한동안 파견된 사례가 없었다. 즉 태종이 즉위하기 전에 전라도원수를 지냈던 것이 기록상 거의 유일한 예라 할 수 있다(『태종실록』 11년 1월 5일). 하지만 이는 후대의 도원수와는 성격이 달랐다.

1433년(세종 15)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을 정벌하기 위해 출동했던 군의 총지휘관 최윤덕(崔潤德)에게 부정(赴征)도원수라는 칭호가 내려졌다(『세종실록』 15년 5월 3일). 하지만 당시 그의 공식 직함은 평안도도절제사였다(『세종실록』 15년 1월 19일). 그러므로 부정도원수는 관용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실제 제수된 직함은 아니었다. 실제 직함으로 출동한 사람은 성종 때 건주야인 정벌의 총지휘관을 제수받은 윤필상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도원수가 원정군 총지휘관의 직임으로 사용되었다.

2) 파견 확대와 직무 다각화

도원수는 성종 때 주로 북방 원정군의 총지휘를 맡았던 것과 더불어 적의 침입을 대비한 변방의 방비를 강화하는 일로도 파견되었다. 즉 원정군 총지휘관이 아닌 일로도 파견되었다. 1491년(성종 22) 북정(北征)도원수로 허종을 임명했음에도 이극균을 서북면도원수로 제수했다(『성종실록』 22년 5월 26일).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2명의 도원수가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전자는 군대를 직접 거느리고 적진으로 출동하는 역할이었고, 후자는 후방에서 각종 방비 사업을 주도하는 역할이었다. 한꺼번에 2명이 임명된 사례는 그만큼 파견이 잦았으며 직무도 다양해졌음을 의미했다.

3) 전쟁의 거대화에 따른 역할 분담과 조정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맞이하여 도원수의 임명이 일시적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쳤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일본군이 철수할 때까지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일본군의 움직임에도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전쟁 후유증을 수습하기 위하여 계속 동원되고 계엄 상태를 유지하려면 도원수를 임명해야 했다. 이는 전에 상황이 끝나면 즉시 도원수직을 회수했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김명원에 이어 둘째 번으로 임명된 권율(權慄)은 육군만 지휘하고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된 이순신(李舜臣)에 의해 움직였다. 총지휘권이, 권율에게 있었으나 수군에게는 제한적이었다. 수군의 활약이 컸기 때문인데, 이를 계기로 삼도수군통제사는 상설직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변화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이장희, 「도원수 권율론」, 『근세조선사논고』, 아세아문화사, 2000.
  • 차문섭, 「조선 중기 왜란기의 군령·군사지휘권 연구 - 도체찰사·도원수를 중심으로」, 『한국사학』 5, 198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