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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4 기준 최신판



17세기 초 이시발(李時發)이 황해도에서 전사자의 자제로 새로이 편성한 정예 지방군.

개설

17세기 들어서면서 북방 여진족의 위협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자 조선에서는 시급히 지방에 정예 군병을 확보하고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 도에서 다양한 명목의 정예 병종을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평안도의 정초군(精抄軍), 충청도의 자모군(自募軍)과 함께 황해도에는 장서군(壯西軍)과 별승군(別勝軍)을 편성하였다. 이 외에도 다양한 병종이 창설되어 각 도의 감영이나 병영, 방영 등의 각종 진영에 소속되었다.

담당 직무

별승군은 주로 장서군과 함께 황해도의 다른 일반 군병과 달리 수자리 서거나 북방으로 나아가서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특히 별승군은 평안도의 가장 중요한 방어 거점인 평안 감영이 있던 평양이나 평양 병영이 있던 안주 등지에 배치되어 이 지역 방어의 핵심 군사력으로 역할을 하였다(『인조실록』 3년 6월 19일). 또 안주 등지의 주요 고개 등에 배치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3년 11월 14일). 정묘호란 당시인 1627년(인조 5) 1월 후금군의 공격에 위급하였던 안주에 1,700여 명의 별승군이 증원군으로 출정하여 안주성 방어 전투에 참가하였다(『인조실록』 5년 1월 17일). 이들은 안주성 함락과 함께 대부분 전사하였다.

변천

17세기 초 이시발이 전쟁 중 전사자의 자제 중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창설한 군병이었다(『인조실록』 6년 10월 4일). 특히 점차 시급해지는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황해도 군병 중에서 따로 모집하여 창설한 별승군은 최초에는 그 규모가 3천 명 정도였다(『인조실록』 2년 3월 5일). 그러나 점차 규모가 확대되어 1623년(인조 1) 4월경에는 8천여 명에 달하였다(『인조실록』 1년 4월 22일). 따라서 이후 평안도 방어의 핵심 군병의 하나로 평양 및 안주 방어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고 특히 안주성 방어 전투의 주력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 군사력을 재건하면서 그 일환으로 지방군을 속오군을 중심으로 재편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의 대부분의 지방 특수 병종들은 속오군으로 흡수되거나 정예 군사들만을 가려 뽑아 부역을 면제해주는 등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별승군은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잠곡유고(潛谷遺稿)』
  •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7(조선후기 1), 경인문화사, 2012.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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