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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3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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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숭덕 |
한글표제 | 숭덕 |
한자표제 | 崇德 |
분야 | 연호 |
유형 | 연호 |
지역 | 중국(中國) |
시대 | 청(淸) |
왕대 | 태종(太宗) |
집필자 | 김가람 |
사용지역 | 중국-청 |
사용왕대 | 태종 |
사용기간 | 1636년~1643년(태종11~태종18)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숭덕(崇德) |
중국(中國) 청(淸)나라 태종(太宗) 대에 사용한 연호로(1636년~1643년), 조선(朝鮮)에서는 인조(仁祖)가 사용한 연호.
개설
중국 청나라의 제 2대 황제인 태종이 사용한 2개의 연호 가운데 2번째 연호이다(1636년~1643년).
태종이 황위에 오를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1590년대에 조선과 일본(日本) 사이에서 발생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명(明)나라가 조선을 돕기 윙하여 파병을 하면서 동아시아 국가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전쟁 당사자국 뿐만 아니라, 파병을 하였던 명나라까지 국력이 쇠퇴하였고, 이를 틈타 만주족이 동아시아의 변방국들을 병합하였다. 그리고 1618년 만주족은 명나라를 침입하여 청나라를 세우고, 이후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의 전쟁은 한참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황위에 오른 청나라의 태종은 1636년 조선에 침공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으며, 이듬해인 1637년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전쟁의 여파로 조선은 사회 내 · 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대표적인 것으로 명나라와의 사대관계(事大關係)를 끊고,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확립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의 연호 또한 명나라의 것이 아닌 청나라의 것을 따르게 되었으나,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반발로 인하여 공적인 문서가 아닌 경우에는 계속하여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한편 숭덕(崇德) 연간은 인조14년부터 인조21년까지인데, 이 연호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15년(1637년) 1월 21일자에 실린 인조가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후 『인조실록』에서는 공식 문서 및 역서(曆書) 등에 숭덕 연호를 사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번 논의한다. 이것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숭덕 연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조선의 반발이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또한 이 시기 기사들의 연대(年代)에 계속하여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하다가, 1644년에 이르러서야 청나라 연호인 ‘순치(順治)’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청사고(淸史稿)』
- 이현종 편, 『동양연표(東洋年表)』, 탐구당,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