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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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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웅후 |
한글표제 | 웅후 |
한자표제 | 熊候 |
상위어 | 군례(軍禮) |
관련어 | 미후(麋候), 시후(豕候) |
분야 | 왕실/왕실의례/예기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허태구 |
용도 | 의장용(儀仗用) |
재질 | 적색포(赤色布), 백칠피(白漆皮), 대나무 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웅후(熊候)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8년 8월 3일, 『영조실록』 19년 3월 29일, 『정조실록』 3년 9월 25일, 『영조실록』 19년 4월 30일, 『영조실록』 19년 윤4월 7일 |
조선시대에 왕이 활을 쏠 때 쓰던, 곰의 머리가 그려진 과녁.
개설
어사(御射) 즉 왕이 직접 활을 쏠 때 사용하던 전용 과녁으로, 중앙에 곰의 머리를 그려 넣었다. 사우사단의(射于射壇儀), 대사례(大射禮) 등의 군례(軍禮)를 거행할 때 설치되었다.
연원 및 변천
대사례는 왕과 신하가 회동하여 활쏘기를 하면서 예(禮)와 악(樂)을 익히고 이를 통해 군신 간의 질서와 도리를 확인하고 화목함을 도모하는 행사이다. 조선시대의 활쏘기는 사후(射侯), 관람하는 것은 관사(觀射)라고 하였다. 활쏘기는 무예(武藝)의 수련과 경합, 유흥과 친목 도모를 위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본래 활쏘기는 육예(六藝)의 하나로 마음의 수련을 의미하였고, 활쏘기의 관람은 수련으로 인해 체득한 덕(德)의 드러남을 살피는 것이었다.
조선은 건국 후 사례(射禮) 의식을 정비하여, 왕이 신하들과 함께 직접 활을 쏘는 사우사단의, 신하들이 활을 쏘는 것을 참관하는 관사우사단의(觀射于射壇儀), 지방 수령(守令)이 주재하는 향사의(鄕射儀) 등의 의주(儀註)를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정리해 놓았다. 대사례는 사우사단의를 바탕으로 제정된 의례로, 1477년(성종 8) 8월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성종실록』 8년 8월 3일). 주로 문묘(文廟) 참배 및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등이 부대 행사로 수반되었다. 영조대에는 대사의(大射儀)라고도 하였다(『영조실록』 19년 3월 29일). 정조 연간에는 연사례(燕射禮)가 자주 시행되었는데, 활쏘기 외의 부대 행사는 거행되지 않았다(『정조실록』 3년 9월 25일).
각종 사례를 거행할 때는 활을 쏘는 주체에 따라 과녁과 연주되는 음악 등에 차등을 두어 군신 간의 위계와 질서를 확인하려 하였다. 웅후는 왕이 직접 활을 쏠 때만 설치한 과녁으로, 신하들이 활을 쏠 때는 미후(麋候)를 설치하여 차등을 두었다. 시후(豕候)는 무과 및 군사들의 교습에 사용되었다. 웅후·미후·시후는 과녁의 색깔과 모양을 달리하여 구별하였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고대 중국의 천자는 호후(虎候), 제후(諸侯)는 웅후, 경대부(卿大夫) 이하는 미후를 사용했다고 한다. 웅후는 사단(射壇)에서 90보(步) 거리에, 화살막이 판인 핍(乏)은 웅후의 동쪽과 서쪽 10보 거리에 각각 설치되었다. 마주 보는 두 핍 안에는 획자(獲者)가 들어가, 발사된 화살을 줍고 화살의 명중 여부를 확인하였다. 웅후를 비롯해 활쏘기에 쓰이는 각종 사기(射器)의 설치는 훈련원(訓鍊院)에서 맡아보았다.
형태
『세종실록』「오례」에는 웅후·미후·시후의 형태와 제작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웅후는 붉은색 베로 사각형 바탕을 만드는데, 높이와 너비는 각각 1장(丈) 8척(尺)으로 한다. 과녁의 정중앙 부분인 정곡(正鵠)은 가죽으로, 가로와 세로가 각각 6척인 사각형 모양이 되도록 만든다. 표면에 흰색 칠을 하고 그 위에 곰의 머리를 그려 넣은 뒤 바탕이 되는 붉은색 베의 한가운데에 붙인다. 붉은색 베의 네 모서리에 끈을 단 뒤, 이 끈을 지면에 고정하는 두 개의 막대 상단과 하단에 각각 묶으면 완성된다. 미후의 제작법은 웅후와 동일하다. 다만 바탕이 되는 베의 빛깔이 푸른색이며, 정곡에 큰 사슴[糜]의 머리를 그려 넣는 점이 다르다. 시후는 정곡에 돼지의 머리를 그려 넣는다.
1743년(영조 19) 윤4월에 영조가 거행한 대사례의 의식 및 준비 과정을 기록한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에도 웅후의 제작법과 형태, 재료 등이 실려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제작된 웅후는 홍염포(紅染布)로 만들었으며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각 18척이었다. 과녁의 정중앙 부분은 정곡 대신에 관(貫)이라 하였는데, 백피(白皮) 위에 곰의 머리를 그려 넣었다. 조선전기에 제작된 웅후와 달리 관 바깥에 세 개의 정방형 과녁인 삼정(三正)을 추가로 부착하였는데, 이는 고례(古禮)를 따른 것이다(『영조실록』 19년 4월 30일). 그 결과 조선전기의 웅후가 두 개의 정방형이 겹쳐져 있는 모양인 데 비해, 『대사례의궤』의 웅후는 다섯 개의 정방형이 포개져 있는 모양이 되었다. 삼정은 주색(朱色)·백색(白色)·창색(蒼色)의 차례로 칠하고, 네 모서리를 붉은색 줄로 연결하여 붉은색 대나무에 묶는다. 미후는 이정(二正)만 추가하는데, 주색·녹색(綠色)의 차례로 칠한다. 네 모서리는 푸른색 줄로 연결하여 푸른색 대나무에 묶는다(『영조실록』 19년 윤4월 7일).
그 당시에 웅후 1개를 제작하는 데는 재봉실용 마사(麻絲) 1냥(兩), 관피(貫皮) 제작용 회우피(灰牛皮), 삼정을 만드는 데 쓰이는 안료인 당주홍(唐朱紅)·진분(眞紛)·하엽(荷葉) 각 4냥, 곰 머리를 그리는 데 사용되는 안료인 당주홍 1전(戔)·진분 5전·도황(桃黃) 5분(分), 그림을 그릴 때 틀로 사용하는 소연목(小椽木) 4개, 숙마(熟麻)로 꼰 줄 30파(把), 관피 재봉용 생모시 2전, 관의 사면(四面)을 세 번 두르는 데 쓰이는 오승포(五升布) 175척 등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
- 강신엽, 「조선시대 大射禮의 시행과 그 운영-『大射禮儀軌』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16, 2001.
- 신병주, 「영조대 大射禮의 실시와 『大射禮儀軌』」, 『한국학보』106, 2002.
- 심승구, 「조선시대 大射禮의 설행과 정치사회적 의미-1743년(영조 19) 大射禮를 중심으로-」, 『한국학논총』32,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