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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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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자접 |
한글표제 | 자접 |
한자표제 | 紫楪 |
상위어 | 접시 |
관련어 | 자색종(紫色鍾)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한영도성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박정민 |
용도 | 음식 |
재질 | 자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자접(紫楪)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문종실록』 즉위년 8월 6일, 『태종실록』 6년 윤7월 17일, 『세종실록』 13년 11월 10일, 『연산군일기』 8년 8월 8일 |
중국 명나라에서 조선 왕에게 선물한 자주색의 접시.
개설
자접(紫楪)은 중국 황제가 조선 왕에게 하사한 자주색의 접시이다. 자접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그릇의 색깔만 알 수 있을 뿐 그릇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함께 언급된 다른 그릇이 모두 자기(磁器)이므로 자접 역시 자주색의 자기 접시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연원 및 변천
명나라 황실은 각종 도자기를 비롯한 다양한 물품을 조선 왕실에 하사하였다. 조선전기에 명나라 황실에서 선물로 받은 다른 도자기는 대부분 코발트 안료로 그림이 그려진 청화백자이거나 여러 가지 종류의 청자였다. 그러나 1450년(문종 즉위)에 명나라 사신 정선(鄭善)이 선물한 도자기 중에는 27개의 자접이 포함되었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6일).
자접은 자주색을 띠는 접시를 의미한다. 자접은 그릇의 색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자주색으로 그릇에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릇의 색깔 자체가 자주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은 유약 혹은 안료의 색이다. 그렇다면 자접은 자주색의 유약을 그릇 전체에 시유하였거나 그릇에 자주색의 안료를 가득 칠하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시유한 그릇이었을 것이다.
자주색은 붉은색이 감도는 짙은 남색으로 권위를 상징한다. 자주색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왕실과 귀족이 주로 사용하는 특별한 색깔이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조선초기에는 자주색은 고귀함을 나타내므로 일반은 물론 관복에도 사용할 수 없는 색깔이었다(『태종실록』 6년 윤7월 17일), (『세종실록』 13년 11월 10일). 명나라에서 황제는 황색을 사용하였고, 황후는 자색을 사용하였다. 조선 왕의 곤룡포는 강색(絳色)이라는 진홍색이었다. 그러므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事大之禮]가 엄격하게 지켜졌던 15세기 초반에는 일반에서 자주색을 사용하는 것을 단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생활에서는 자주색이 옷감과 장식품에 많이 사용되었던 것을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화려한 것을 좋아했던 연산군은 검소함을 강조하는 신하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자주색이나 초록색의 옷감을 많이 사용했다(『연산군일기』 8년 8월 8일).
오방색(五方色)은 청(靑), 적(赤), 백(白), 흑(黑), 황(黃) 등으로 각각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하는 틀을 갖춘 양(陽)의 색에 해당한다. 반면 자(紫), 홍(紅), 녹(綠) 등은 오방색의 사이에 자리하는 중간적인 성격의 간색(間色)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조선중기 이후에는 왕의 공식 의복인 곤룡포가 붉은색이었다면, 왕과 왕비를 비롯한 세자의 평상복에는 자주색이 사용되었다. 자주색은 권위를 상징하므로 일반의 사용을 통제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자주색을 염색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고 염색에 필요한 품질이 좋은 원료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민간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주색으로 만들어진 잔과 접시는 특별하고 귀한 그릇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세자에게 청화백자는 선물하면서도 자주색의 그릇은 따로 선물하지 않았고 오직 왕에게만 하사했다. 자접과 함께 등장하는 자색종(紫色鍾)이라는 자주색의 잔 역시 왕에게만 전달하였다.
참고문헌
- 김경실, 『조선시대 궁중 진연 복식』, 경춘사, 2003.
- 방병선, 『중국도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