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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4 기준 최신판



옛 글씨 가운데 배우거나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필적을 탑본(榻本)의 형태로 모아놓은 서첩.

개설

서예의 법도가 잘 갖추어진 작품을 법서(法書)라 하는데, 서예사에서 공인되는 법서들의 탑본이나 각첩(刻帖), 영인본(影印本) 등을 모아놓은 책자를 법첩(法帖)이라 한다. 법첩이라는 명칭은 992년(송 순화 3)에 역대 법서 10권을 목판에 새기고 탁본을 하여 책자로 엮은 『순화각첩(淳化刻帖)』의 각 권 첫머리에 ‘법첩제일(法帖第一)’부터 차례로 붙인 목차에서 유래하였다.

연원 및 변천

‘첩(帖)’이라는 의미는 다양하나 보편적으로는 ‘비(碑)’에 대칭되는 ‘묵적본(墨跡本)’을 뜻한다. 비단이나 종이에 쓰인 묵적은 세월이 가면 없어지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고안되었는데, 문명의 발달에 따라 임모(臨摹)를 하거나 목판이나 석판에 새겨 탁본을 하기도 하고, 영인을 하기도 하였다.

한나라왕망(王莽) 시기에 진준(陳遵)이라는 서예가가 있었다. 그의 생애를 기록한 『전한서』 「진준전」에 “진준이 편지를 써 보내면 받는 사람은 이것을 보관하였다.”라고 하였듯이 당시에는 잘 쓴 글씨를 보관하는 풍습이 있었다. 진(晉)나라의 장지(張芝)나 종요(鍾繇), 위관(衛瓘) 등의 편지를 보관하는 것이 특히 유행하였다. 이 밖에도 왕도(王導)가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했을 때 종요의 「선시표」를 품속에 넣고 왔다든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혹애하여 우세남·저수량·풍승소 등에게 임모시켜 대신들에게 하사하고 「난정서」를 순장하도록 했다는 등의 고사가 있다. 이렇듯 서예의 명작들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보급되어 왔다. 이때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복제가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데, 옛날에 널리 쓰인 복제 방법 가운데는 첫째로 임모가 있었고, 둘째는 먼저 글자의 윤곽을 그리고 가운데를 먹으로 채워 넣는 쌍구곽전법(雙鉤廓塡法)을 썼다. 셋째는 밀랍 같은 것을 칠하여 종이를 투명하게 만든 다음 원본 위에 덮고 모사하는 경황구모법(硬黃鉤摹法)이 있다. 넷째는 암실에서 밖으로 사발만 한 구멍을 뚫어 그곳에 원본과 백지를 함께 걸어놓고 들어오는 빛을 이용하여 모사하는 향탁법(響拓法)을 썼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좋은 법서들을 모사하여 여러 사람이 곁에 두고 글씨를 익혔는데, 좀 더 발전된 방법으로 돌이나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 탁본을 하여 널리 보급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각첩(刻帖)이다. 오대(五代)에 궁중에 소장된 고대 명가 묵적들을 이승검(李昇檢)이 석판에 새겨 만든 『승원첩(昇元帖)』이 있었다. 하지만 이 첩은 혼란기에 파손되어 없어지고, 현존하는 최초의 각첩은 992년(송 순화 3)에 『순화각첩』이다.

『순화각첩』은 시서학사(侍書學士)인 왕저(王著)가 칙명을 받아 비각(秘閣)에 소장하고 있던 법서를 대추나무 널빤지 184쪽에 새기고 징심당지(澄心堂紙)에 이정규(李廷珪) 먹을 써서 탁본을 하여 10권의 책자로 엮은 것이다. 이는 고대 제왕들로부터 당나라 서예가들까지 법서들을 모아놓은 총첩(叢帖)인데, 특히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를 가장 많이 수록하였다. 하지만 『순화각첩』에 수록된 필적은 채택한 것이 정확하지 않으며, 표제에 오류가 있고, 편차도 어지러워 이를 수정하고 보완한 법첩들이 다시 만들어졌다. 1090년(송 원우 5)에 『순화각첩』에 수록되지 않은 묵적을 보충하여 『순화속첩(淳化續帖)』을 간행하였다. 또 1109년(송 대관 3)에 채경(蔡京)의 책임하에 『순화각첩』에 있는 결점을 보완하고 목차를 수정하여 『대관첩(大觀帖)』을 간행하였다. 이후 원·명과 청나라 초기까지 관(官)과 사가(私家)를 막론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각첩을 간행하였다. 이 중 가장 방대하면서도 정밀하다고 평가되는 것이 1750년(청 건륭 15)에 양시정과 장부 등이 칙명을 받아 간행한 『삼희당법첩(三希堂法帖)』이다. 이것은 위나라 종요(鍾繇)부터 명나라 동기창(董其昌)까지 궁중에 소장된 역대 서예가 134명의 340작품을 495개의 부양석(富陽石)에 새긴 것을 복제한 것이다. 임모와 새김, 탁본의 솜씨가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일 뿐만 아니라 탁본에 사용한 종이와 먹 또한 최고의 것을 사용하여 32권으로 엮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법첩은 안평대군이용(李瑢)이 1443년(세종 25)에 간행한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이 그 효시를 이루며, 신공제(申公濟)가 우리나라 역대 명인의 필적을 모아 만든 『해동명적(海東名迹)』을 비롯하여 이우(李俁)의 『동국명필(東國名筆)』, 이지정(李志定)이 간행한 것으로 알려진 『대동서법(大東書法)』, 박문회(朴文會)의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 백두용(白斗鏞)의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양신방 저, 곽노봉 역, 『중국서예80제』, 동문선, 1997.
  • 陶君明, 『중국서론사전』, 호남미술출판사, 2001.
  • 梁披雲 외, 『중국서법대사전』, 서보출판사, 1985.
  • 周俊杰 외, 『서법지식1000제』, 하남미술출판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