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포(綿布)"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10일 (일) 00:23 기준 최신판



목화에서 추출한 면으로 짠 직물.

개설

목면은 명주[絹], 삼베[麻], 모시[苧] 등에 비해서 아름다우면서도 견고함이 우수하고, 한기(寒氣)를 막는 보온성과 습기를 흡수하는 기능이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경제성도 뛰어났다. 목면은 다른 어떤 직물을 직조하는 것보다 노동 시간이 짧았는데 방적 과정에서 같은 양의 실을 만드는 데 면은 약 1/5 정도의 노동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15세기 초반부터 조정은 면화 생산을 적극 장려하였고, 이 결과 농가의 면업(綿業)은 빠르게 확대되었다.

연원 및 변천

면포는 고려시대 1363년(고려 공민왕 12)에 문익점(文益漸)에 의해 원나라에서 도입되고, 정천익(鄭天益)이 실을 뽑을 수 있는 기구인 방적구(紡績具)를 만들면서 일반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삼국시대에도 면직물이 생산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풍토가 면화 재배에 적당한 지역이어서 함경북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면화를 재배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면포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면서 조정은 면포 생산을 적극 장려하였다. 조선전기 면포는 대일무역에서 주요 결제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또 15세기 중엽부터 면화 재배가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대중 의류의 재료로 각광을 받게 되었고, 공사(公私)의 가장 중요한 교환수단으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화폐적 기능을 갖게 되었다. 면포의 교환기능이 확대되면서 군역의 대체 수단으로 면포를 조세로 납부하기 시작하였고 국가 재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형태

면포의 품질은 승수(升數)로 평가하는데 한 폭에 날실 80올로 직조된 것을 1승이라고 한다. 15세기 말부터 부세체제나 대일무역에서 사용되던 면포는 5승포로 길이 35척 이상의 양포(良布)가 사용되었고, 민간에서는 4승포로 길이 35척 미만의 감축포(減縮布)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이중적 면포 유통 구조는 16세기 들어와 더욱 급속히 진행되었다. 조정이 정한 규격에 맞지 않는 면포의 유통을 금지시키면서 면포의 유통이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도 하였다. 면포가 군역의 대체 수단이 되면서 상납하는 면포 즉 무명의 품질도 높아졌다. 양역변통 논의 결과 1704년(숙종 30) 군영마다 달랐던 대역가를 6승포 길이 40척의 면포 2필로 통일하면서 상납하는 면포의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일상적으로 7승포 정도가 튼튼하고 실용적이어서 상류층의 일상복에 많이 이용되었고, 12승포나 15승포는 고급 면포에 속하였으며, 21승포도 제작되었다. 면포는 소색(素色)으로 짜서 표백해 사용하거나, 염색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반드시 소색으로 짜지는 않았다. 면포는 색상이나 품질에 따라 백면포·홍면포·오색목·백세목·생상목·홍세목·황세목·초록목·남목·자목·홍목·흑목·아청목 등 다양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면포가 군역 대체품이 되고부터는 집안에서 여성들은 1년 내내 면포를 짜야 했다. 또 화폐로도 사용했던 면포는 의복이나 물물교환 수단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여성들은 계속해서 길쌈을 해야했다.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납부해야 할 군포의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각종 사모속의 증가로 인해 지방군제가 어지러워지면서 백성들의 면포 부담은 오히려 가중되었다. 이로 인해 군역은 조선의 부세체제인 삼정(三政) 중에서 가장 고된 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2, 일조각, 1997.
  • 이재룡, 『조선전기 경제구조연구』, 숭실대학교출판부, 1999.
  • 남미혜, 「조선전기 면업정책과 면포의 생산」, 『국사관논총』80, 1998.
  • 송재선, 「16세기 면포의 화폐기능」, 『변태섭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삼영사, 198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