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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2 기준 최신판



[정의] 모직물로 만든 깔개나 담요.

개설

계담은 모직물로 만든 우리나라의 전통 융단이다. 깔개, 방장(房帳), 자리, 요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탑등(毾㲪), 모담(毛毯), 융담(絨毯)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조선철(朝鮮綴) 또는 조선모철(朝鮮毛綴)이라고 하는데, 이는 날실을 팽팽하게 건 곳에 색이 있는 씨실을 무늬의 색에 따라 꿰매 가듯이 짜 넣는 평직의 변화 조직으로 태피스트리(tapestry) 기법을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에는 청동기시대 때부터 모직물로 만든 깔개가 있었다. 청동기시대 유적지로 알려진 평안북도 강계시 공귀리 유적에서 흙으로 빚어 만든 수직식 직기의 추가 발견되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당나라 태종에게 ‘오색구유(五色氍毹)’를 보냈다고 하였는데, 『광운(廣韻)』에 구유는 모석(毛席) 또는 요(褥), 즉 털방석 또는 담요를 의미한다고 했다.

고려시대 『삼도부(三都賦)』에도 고려의 귀족들은 바닥에 채담(彩毯)을 깔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역시 다채로운 무늬를 넣어 짠 융단이었다. 이처럼 화려하게 만든 깔개 내지 담요는 조선시대에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계담은 사치 품목으로 규정되어 여러 차례 금지하는 명이 내려졌다.

1472년(성종 3) 사치를 금하는 전지(傳旨)에 따라 예조(禮曹)에서 올린 『속육전(續六典)』의 혼인 조목에서 혼석(昏夕)의 배석(拜席)에 계담을 사용할 수 없으며, 단지 한 겹 돗자리만을 쓸 수 있게 하였다(『성종실록』 3년 1월 22일). 또 1541년(중종 36)에는 당하관 이하에서는 혼인 때 화려하고 값비싼 비단과 계담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장 80대에 처한다(『중종실록』36년 12월 29일)고 한 것으로 보아 계담을 사치 품목으로 보고 강력하게 규제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형태

계담은 주로 깔개, 방장, 담요 등으로 사용하였으므로 그 형태는 네모난 방형이 주를 이룬다. 계담에는 호랑이, 사자, 봉황, 매화, 기타 초목 등의 무늬를 넣었으며, 남색을 기본으로 짙은 갈색, 연갈색, 주황색, 연두색, 흰색 등을 섞어 조화를 이루었다. 한국적 색채의 조화가 잘 드러나는 물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우리나라 전통무늬1 직물』, 눌와, 2006.
  • 심연옥, 『한국직물 오천년』, 고대직물연구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