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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19 기준 최신판



도자기로 만들어진 몸통이 길고 북같이 생긴 술그릇.

개설

장본(獐本)은 술, 물 등을 담는 그릇이다. 몸통이 길어서 장본(長本)이라고도 하며 흔히 장군이라고 지칭된다. 1824년(순조 24)에 나온 『유씨물명고(柳氏物名考)』에는 장분(長盆)으로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여러 이름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본은 분청자, 백자는 물론 도기로도 제작되었다. 분청자와 백자로 제작된 장군은 주로 조선전기에 많이 사용된 데 비하여, 도기 장군은 조선후기까지 계속 만들어졌다. 조선후기에는 도기 장군을 크게 만들어 거름을 모으거나 퍼 나르는 데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장본은 『조선왕조실록』에 북처럼 생긴 술그릇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7년 2월 15일). 실제 오늘날 장군으로 지칭되는 장본은 조선전기에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속호장본(俗號獐本)’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 북같이 생긴 술그릇을 장본이라는 한자로 정확히 지칭했는지 아니면 기록할 때마다 장본이라는 음가에 해당하는 적당한 한자를 새로이 붙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선후기의 기록에는 그릇의 동체가 길어서 붙었을 것으로 보이는 장본(長盆)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장본은 삼국시대에는 질그릇으로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도자기로 만들어졌다. 편병(扁甁)과 함께 야외에서 사용하기 편리한 그릇으로 인식되지만, 일부 장본에 달려있는 굽으로 보아 꼭 야외에서만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조선시대 고분에 대한 고고학 발굴 성과를 살펴보면, 장본은 주병(酒甁) 대신에 부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장본이 주기(酒器)로 언급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도 부합한다.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장본은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다. 분청자로 제작된 장본은 특히 문양이 다양하여 여러 지역에서 일정 기간 동안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자 장본의 문양은 상감 기법은 물론 인화 기법과 철화 기법 등으로 시문되었으며, 소재 역시 매우 다양하다. 백자 장본은 대부분 외면에 별다른 문양이 없이 만들어졌다. 자기 장본이 주로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에 비하여 도기 장본은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조선후기에 도기 장본은 술그릇보다는 주로 장이나 식초를 저장하거나 거름을 운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형태

장본은 원통형의 동체가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이다. 위쪽에 구연부가 있는데 구연은 대부분 나팔형으로 외반(外反)한다. 장본의 몸통은 옹기를 만드는 것과 같이 우선 둥근 밑판을 만들고 그 위로 흙 띠를 쌓아 올리다가 끝을 둥글게 오므려 만든 탄두형(彈頭形)이다. 완성된 몸통은 옆으로 누인 다음 위쪽에 구연을 달고, 그 반대편 아래쪽에는 별도의 굽을 마련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에는 장본의 형상은 도고(鼗鼓)와 같고 배에 주둥이가 있는 술그릇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통형 틀의 양쪽 끝을 가죽으로 막아 치는 북의 모습이 장군의 형태와 비슷하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조선시대 장본은 분청자, 백자와 같이 자기로 제작되었으며 도기로도 만들어졌다.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토광묘(土壙墓)에서 도기 장군이 백자 잔과 함께 출토되는 상황을 감안할 때, 장군은 주병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유씨물명고(柳氏物名考)』
  • 최남미, 「朝鮮時代 磁器 장군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