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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4 기준 최신판



토호·양반·영저리들이 환곡의 분급 규정에 따라 환곡을 받지 않고 수령이나 감사와의 친분 관계를 빌미로 환곡을 따로 받았던 것.

내용

별환은 본래 지역 거주민이 아니지만 장례를 치러야 할 사람이 통내(統內)에 노비나 친척으로 있을 경우 통수(統首)의 보단자(保單子)를 관에 제출하고 받는 환곡을 말하였다. 이런 환곡은 감영이 관리하는 환곡, 즉 감영곡으로 18세기 전반까지는 왕조 정부의 규제를 크게 받지 않아서 감사가 융통성 있게 사용할 수 있었다. 감영곡은 떠돌아다니다가 객지에서 임시로 사는 사대부를 진휼하기 위하여 쓰기도 하였다. 송시열도 궁핍할 때에는 이런 종류의 환곡을 받아 생활하다가 제때에 갚았다고 한다.

그러나 별환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향촌 내의 세력 있는 자들로서 많은 양의 환곡을 받아 내어 모리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심한 경우 이들은 환곡을 상환하지 않아서 환곡의 난봉(難捧)·미봉(未捧)의 폐단을 초래하였다. 또 환곡을 상환할 시기에 도망함으로서 이징(里徵)·족징(族徵)의 폐단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영조 연간에 별환을 금지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용례

今宜修明舊制 而道臣之請捧留停退代錢者 亦依違制之律 本廳之私給別還者 亦加重勘 而分還準捧事 自廟堂成節目啓下 以爲遵行之地 似爲得(『정조실록』 18년 1월 9일)

참고문헌

  • 『조선민정자료(朝鮮民政資料)』 목민편(牧民篇)
  •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대한 연구」, 『한국사론』 21 , 1989.
  • 정형지, 「조선후기 진휼정책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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