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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2 기준 최신판



국가 재정이 부족할 때 별도로 추가하여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는 것.

개설

국가 수입은 공안(貢案)에 정해져 있어 쉽사리 수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부족할 때면 공안에 정해진 공물 액수 외에 늘려서 징수하였는데 이를 가정(加定)이라 한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 국가가 사용하는 경비는 공안의 공물 액수 범위 내에서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경비의 증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재정 수입을 함부로 늘리거나 줄일 수는 없었다. 공안에 덧붙여 기록하면 이후로는 계속 지켜야 하는 법이 되기 때문에, 다음에 비록 사용할 곳이 없어도 그대로 징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경비가 부족할 경우에는 임시로 가정·인납(引納)을 통해 필요 물자를 보충하였다.

내용

조선전기 국가의 재정은 공안과 횡간(橫看)에 의해 운영되었다. 공안과 횡간은 국가 재정의 모든 것을 망라하였다. 공안은 국초부터 제정되어 있었지만, 횡간은 세조대에 이르러서 제정되었다.

공안은 1392년(태조 1) 제정된 이래 여러 차례 수정되었다. 최초의 수정은 1398년(정종 즉위) 초에 있었다. 1401년(태종 1)에는 나라에 바치는 세금인 공부(貢賦)를 개정하였는데 이때에도 다시 수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태종실록』 1년 5월 3일). 1408년(태종 8)에는 제주(濟州)의 공부를 제정하고(『태종실록』 8년 9월 12일), 1413년(태종 13)에는 동서양계(東西兩界)의 공부를 제정하였으므로 이때에도 공안을 수정하였을 것이다(『태종실록』 13년 11월 5일). 그 후로는 세조대에 이르기까지 공안이 수정되지 않았다.

조선초기에는 지출의 기준이 되는 경비식례(經費式例)가 없었기 때문에 경비 지출이 방만하게 운영되었다. 그 결과 백성들에게 함부로 많은 공물을 거두어들였다. 세종대 공안 세입은 경비에 비해 방대한 금액에 달하여 그 대비는 2~3배 이상, 품목에 따라서는 7~8배에 달하였다. 그래서 세종대에는 방만한 경비 운영과 과다한 각사의 경비 책정을 바로잡기 위해 경비식례를 제정하였다. 각사의 경비식례 제정은 향후 횡간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후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횡간이 제정되었고(『세조실록』 10년 1월 27일), 성종대에는 이를 보완한 신횡간(新橫看)이 제정되었다.

성종대에 신횡간이 만들어지면서 공안도 개정되었다. 이때 그 액수를 지나치게 삭감하여 책정했기 때문에 심각한 경비 부족을 초래하였다. 이에 국가에서는 경비가 부족할 때마다 가정·인납 등의 임시적인 방법으로 경비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경비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공안 증액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개정되지는 않았다.

연산군대에 들어와 이전보다 경비 지출이 현저히 늘어났다. 연산군을 비롯하여 경비를 담당한 호조에서는 무엇보다도 공안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첨정의 직책에 있던 정담(鄭譚)은 각사에서 공물이 부족할 때마다 외방 각관에서 가정하는 민폐를 해결하고자 공안에 덧붙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501년(연산군 7) 4월에는 태평관에 공안상정청(貢案詳定廳)을 설치하고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마침내 공안을 개정하였다(『연산군일기』 7년 4월 15일). 이때 제정된 공안이 이른바 신유공안(辛酉貢案)이다. 공안 개정을 통해 국가 재정이 대대적으로 확충되었지만 국가 재정은 항상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려 가정·인납 등의 형태가 거의 일상화되었다.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낭비가 구조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변천

세종대에 일부 각사의 경비식례가 제정된 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러나 문종·단종을 거쳐 세조 초에 이르러 국가의 재정 지출이 급증하였기 때문에 국고는 위축되었다. 특히 불교 사찰을 짓는 데 필요한 물자와 사원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정·인납 등이 거의 통례처럼 행해졌다. 이후 연산군대에는 왕실의 낭비 등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항상 부족했고 가정·인납도 일상화되었다.

각 군현에 정해진 공물은 그 지방에서 나는 토산물에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제로 그렇게만 할 수는 없었다. 또 처음 공물을 나누어 정했을 때에는 생산되었어도 세월이 지나면서 수확량이 줄거나 더 이상 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가정·인납은 왕실과 중앙 각사의 갑작스런 필요에 의해 단기간에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상인과 관인(官人)·세가(勢家)에서 가정·인납을 대신 납부하고 백성에게는 비싼 대가를 받는 방납(防納)이 성행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김성우, 「16세기 국가재정 수요의 증대와 국역체제의 해체」, 『한국사연구』 97, 1997.
  • 김성우, 「16세기 국가재정의 위기와 신분제의 변화」, 『역사와 현실』 16, 1995.
  • 박도식, 「16세기 국가재정과 공납제 운영」, 『국사관논총』 제80집, 1998.
  • 박도식, 「조선초기 국가재정의 정비와 공납제 운용」, 『관동사학』 7,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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