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료(三時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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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1 기준 최신판



일꾼이나 장인 등 관의 역사에 동원된 일꾼들의 세끼 식사에 드는 요미.

내용

요역노동에 징발된 백성은 부역 기간에 소모되는 식량, 곧 역량(役糧)을 스스로 부담하였다. 역량을 징발역군이 스스로 마련하였던 것은 요역노동이 무상의 강제노동이라는 수취제도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역군에게 역량이 지급되는 특수한 경우도 때로는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15·16세기에는 예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의 토목공사에 징발된 역군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사례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부역노동의 물납세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농민 등을 관의 토목공사에 징발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으며, 동원하더라도 단기간에 그친다든지, 역량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사역하는 일이 많았다.

모립제 하에서 고용된 모군은 품삯을 받았다. 작업 기간 중에 소모되는 식량은 대체로 모군들이 지급받는 고가(雇價) 속에 포함되었다. 때로는 삼시료(三時料)나 점심미(點心米) 등의 명목으로 고가와는 별도로 지급되기도 하였다. 원칙적으로 역량을 지참하지 않는다는 점은 모립제의 고용인부인 모군이 종래의 징발역군과 크게 다른 차이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군현에서 고용하는 향모군(鄕募軍)일 경우에는 간혹 역량을 지참케 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고가를 추가로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1736년(영조 12) 남원현의 수령이 관내의 권농관에게 보낸 전령에서, 이 지역 농촌 임노동자인 용군(傭軍)들이 하루에 미곡 1말(斗)과 삼시(三時)의 주식(酒食)을 받고 일하는데, 그 이상 지급하지 말 것을 지시한 바 있다. 1769년(영조 45)의 명릉(明陵)의 보토(補土) 공사의 경우, 510명의 모군이 19일간 고용되었고, 일을 마친 뒤 19일분의 고가로서 전 2량, 포목 1필씩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밖에도 고가와는 별도로 매일 삼시료를 지급받았음을 볼 수 있다. 모군의 삼시료와 함께 자원역군의 점심미로 지출된 것이 모두 미곡 500여 석에 이르렀다.

용례

兵曹與軍器監提調 議工匠激勵及加數條件以啓 (중략) 一 尙衣院工曹鑄字所匠人無他役 而分番役使 或受三時之料 或受兩時之料 或受賞職 本監匠人五日相遞入番 只受一時之料 各有日役 而無時綵棚儺禮 專掌爲之 (『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참고문헌

  • 『명릉익릉주산봉사태처보토등록(明陵翼陵主山峰沙汰處補土謄錄)』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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