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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9 기준 최신판



명·청대 요동 지역에 있던 역참로.

개설

고교보는 명·청대 산해관(山海關)과 요동 지역을 잇는 역참로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조선의 사행단이 왕래하던 교통로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사신단이 북경을 왕래하는 중에 자주 머물렀던 곳이다.

위치 및 용도

고교보는 현재의 요녕성(遼寧省) 호로도시(葫蘆島市) 고교진(高橋鎭)에 위치한다. 이곳은 이전부터 중원과 요동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명·청대에 교통·통신 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형태 및 현황

현재 고교포지(高橋鋪址)가 남아 있다. 이곳은 고교진 고교촌 안에 있고, 명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역성(驛城)은 이미 사라지고, 지금은 겨우 성터만 남아 있다. 형태는 정방형(正方形)이고, 둘레는 약 200m이다. 이곳에서 나온 유일한 유물은 1578년(명 만력 6) 3월 14일 길일(吉日)에 세운 “고교포(高橋鋪)”라는 현판이다. 『금주부지』에 의하면 “둘레는 1리 24보이고, 동문(東門)이 고교포”라고 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76년(정조 즉위)에 정조가 즉위하자 이를 청(淸)건륭제(乾隆帝)에 주청하기 위해 진주사(陳奏使)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사신 일행이 고교보의 숙소에서 공금을 도난당하였다. 한밤중에 관향은(管餉銀) 1천 냥이 든 주머니를 도난당한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사행을 호송하던 역관 이담(李湛) 등이 금주부(錦州府)에 알리고, 북경에서도 예부(禮部)에 보고하였다. 예부는 황제에게 배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건륭제는 마땅히 액수를 대조하여 지급해야만 대국(大國)의 도리에 합당하다며, 배상을 명하였다.

사행단이 돌아오는 길에 심양에 도착하니, 심양장군(瀋陽將軍)과 형부(刑部)의 관원 등은 도난사건이 발생한 집주인을 비롯해서 혐의를 받은 주민들을 심양으로 끌고 와 수개월간 혹독하게 신문(訊問)하였지만 범인을 밝히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결국, 건륭제의 명에 따라 금주(錦州), 심양(沈陽) 등의 관부에서 은 1천 냥을 조선 사행에게 변상하였다. 물론, 조선의 사신들은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다며 받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저들은 황지(皇旨)를 가지고 굳이 받기를 청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한다(『정조실록』 즉위년 9월 1일).

또한, 1825년(순조 25)에 동지정사(冬至正使)권상신(權常愼)이 사행 중 고교보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순조는 1796년(정조 20), 고(故) 판서심이지(沈頣之)의 예에 준하여 장례를 거행하도록 하였다(『순조실록』 25년 1월 3일).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도곡집(陶谷集)』
  • 『금주부지(錦州府志)』
  • 『계산기정(薊山紀程)』
  • 『담헌서(湛軒書)』
  • 『금주부지(錦州府志)』
  • 서인범, 『연행사의 길을 가다』, 한길사, 2014.
  • 최소자·정혜중·송미령, 『18세기 연행록과 중국사회』, 혜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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