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보(高橋堡)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명·청대 요동 지역에 있던 역참로.

개설

고교보는 명·청대 산해관(山海關)과 요동 지역을 잇는 역참로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조선의 사행단이 왕래하던 교통로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사신단이 북경을 왕래하는 중에 자주 머물렀던 곳이다.

위치 및 용도

고교보는 현재의 요녕성(遼寧省) 호로도시(葫蘆島市) 고교진(高橋鎭)에 위치한다. 이곳은 이전부터 중원과 요동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명·청대에 교통·통신 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형태 및 현황

현재 고교포지(高橋鋪址)가 남아 있다. 이곳은 고교진 고교촌 안에 있고, 명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역성(驛城)은 이미 사라지고, 지금은 겨우 성터만 남아 있다. 형태는 정방형(正方形)이고, 둘레는 약 200m이다. 이곳에서 나온 유일한 유물은 1578년(명 만력 6) 3월 14일 길일(吉日)에 세운 “고교포(高橋鋪)”라는 현판이다. 『금주부지』에 의하면 “둘레는 1리 24보이고, 동문(東門)이 고교포”라고 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76년(정조 즉위)에 정조가 즉위하자 이를 청(淸)건륭제(乾隆帝)에 주청하기 위해 진주사(陳奏使)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사신 일행이 고교보의 숙소에서 공금을 도난당하였다. 한밤중에 관향은(管餉銀) 1천 냥이 든 주머니를 도난당한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사행을 호송하던 역관 이담(李湛) 등이 금주부(錦州府)에 알리고, 북경에서도 예부(禮部)에 보고하였다. 예부는 황제에게 배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건륭제는 마땅히 액수를 대조하여 지급해야만 대국(大國)의 도리에 합당하다며, 배상을 명하였다.

사행단이 돌아오는 길에 심양에 도착하니, 심양장군(瀋陽將軍)과 형부(刑部)의 관원 등은 도난사건이 발생한 집주인을 비롯해서 혐의를 받은 주민들을 심양으로 끌고 와 수개월간 혹독하게 신문(訊問)하였지만 범인을 밝히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결국, 건륭제의 명에 따라 금주(錦州), 심양(沈陽) 등의 관부에서 은 1천 냥을 조선 사행에게 변상하였다. 물론, 조선의 사신들은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다며 받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저들은 황지(皇旨)를 가지고 굳이 받기를 청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한다(『정조실록』 즉위년 9월 1일).

또한, 1825년(순조 25)에 동지정사(冬至正使)권상신(權常愼)이 사행 중 고교보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순조는 1796년(정조 20), 고(故) 판서심이지(沈頣之)의 예에 준하여 장례를 거행하도록 하였다(『순조실록』 25년 1월 3일).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도곡집(陶谷集)』
  • 『금주부지(錦州府志)』
  • 『계산기정(薊山紀程)』
  • 『담헌서(湛軒書)』
  • 『금주부지(錦州府志)』
  • 서인범, 『연행사의 길을 가다』, 한길사, 2014.
  • 최소자·정혜중·송미령, 『18세기 연행록과 중국사회』, 혜안,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