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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9 기준 최신판



창덕궁 선원전 서쪽 내담에 있는 문.

개설

1657년(효종 8)에 효종은 대비인 장렬왕후를 위한 전각을 영건하였다. 궁궐의 서쪽에 장대한 규모의 정전과 별전을 대비전으로 조성해놓아 사람들은 이곳을 서궁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정전과 별전이 바로 만수전과 춘휘전이었는데, 1687년(숙종 13)에 화재가 일어나 만수전은 소실되었고 춘휘전은 다행히 화재를 피하였다. 1695년(숙종 21)에 춘휘전을 선원전이라 이름하고 용도를 바꾸어 사용하였다. 정숙문(正肅門)은 춘휘전 또는 선원전의 권역을 조성했던 많은 문 중 서쪽 내담에 있는 문이다.

위치 및 용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선원전은 인정전의 서쪽에 있고, 2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은 만안문, 서쪽은 만녕문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근거로 선원전의 배치를 획정해 보면, 인정전 뒤뜰 서쪽 담장에 만안문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양지당이 나온다. 마당을 지나 양지당의 서쪽 담장이 선원전의 동쪽 내담이고, 그 사이에 보춘문이 있다. 다시 선원전의 마당을 지나면 서쪽 내담이 있는데 그 담장에 정숙문이 설치되었다. 정숙문을 나가면 빈터의 마당이 있고 다시 서쪽으로 담이 둘러쳐졌는데 이 문이 만녕문이다. 「동궐도」에는 만우문이라 표시되었다. 선원전 앞 남행각의 문이 연경문, 선원전 뒤의 담장에 있는 문이 영휘문이다.

선원전에 어진을 모시거나 봉심할 때, 제의를 치를 때, 정숙문 밖에 악차를 마련해두고 정숙문 앞에서 어진의 궤를 모신 신여를 멈춘 뒤에 궤를 내리고 이 문을 통해 들어갔다(『순조실록』 2년 8월 15일).

변천 및 현황

정숙문의 건립 시기를 만수전이 영건되던 때인 1657년(효종 8)으로 보기는 어렵다. 효종대의 『만수전수리도감의궤』에서는 몇 개의 특정한 문 외에는 대문, 소협문, 문 등으로 표현하여 정숙문이 이때부터 존재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숙(正肅)이라는 액호가 바르고 엄숙하다는 의미인 만큼, 춘휘전이 선원전으로 전용되던 때에 영역을 정리하며 조성한 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문헌에서 정숙문에 관한 내용은 1797년(정조 21) 9월 13일의 기록이 가장 빠른데, 선원전에 나아가 정숙문으로 들어가 예를 행했다는 것이다.

1900년대 초까지 정숙문은 잘 남아있었으나, 1921년에 신선원전이 창덕궁의 북쪽에 새로 건립되면서 본래의 선원전 영역 및 궐내 각사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2000년부터 창덕궁 궐내 각사를 비롯한 창덕궁 서쪽 지역이 복원되면서 2004년에 정숙문도 복원되었다. 이때 현판의 글씨는 정도준이 쓰고 오옥진이 새겨 문 위에 걸었다.

형태

「동궐도」에 보이는 정숙문은 담장 사이에 솟을문으로 설치되었고, 맞배지붕을 얹은 사주문(四柱門)으로 문짝은 열려있어 표현되지 않았다. 지금의 정숙문은 동궐도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우진각지붕에 부연을 단 겹처마로 되어있고, 문짝의 바깥쪽은 완만한 아치 형태의 둥글린 틀을 만들어두고 그 안쪽으로 뇌록(磊綠)을 칠한 2짝 판장문을 달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
  • 문화재청 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 문화재청,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 권역 복원공사 보고서」, 문화재청, 2005.
  • 조옥연, 「조선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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