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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8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경상도 동래현에 있던 수군(水軍)의 진영.

개설

부산진은 부산포에 설치되었다. 부산포는 제포(薺浦)·염포(鹽浦)와 함께 삼포(三浦)로서 왜인들과의 무역을 위한 개항장이었다. 이후 해안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외부세력의 침입 등에 대비하기 위해 부산포에 진영을 설치하게 되었다. 부산포에는 왜관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삼포왜란 이후 폐쇄했다가 임진왜란 이후 절영도(絶影島)에 설치했다. 왜인들은 왜관을 부산성 안으로 이전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는데, 조선 조정은 이 의견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왜관은 1606년(선조 40)에 두모포(豆毛布), 1678년(숙종 4)에 초량(草梁)으로 옮겨 후대까지 유지되었다.

이처럼 부산포에 왜관이 설치되어 있었고,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왜인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부산포는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였다. 따라서 왜인들에 대한 보안 문제와 왜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체제를 갖추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했던 거진(巨鎭)이 바로 부산진이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확인해 볼 때 부산진과 부산포가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산포는 행정구역상 동래도호부의 부산면(釜山面)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부산포는 부산면에 있었던 별도의 행정구역이었다. 1907년 부산부(釜山府)가 설치되면서 부산포는 동래에서 분리되었다. 부산포는 왜관·부산개시(釜山開市)·부산진성 등을 통하여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거래가 가장 왕성하였던 곳이다.

부속 시설로는 부산참(釜山站)과 부산창(釜山倉) 등이 있었다. 부산참은 긴급한 정보나 기밀 사항·연락 사항 등을 전달하는 교통·연락 시설이었다. 부산창은 왜관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동래·울산·기장(機張)에서 수납한 세미(稅米) 등을 보관했다. 부산진 안에 있는 염전(鹽田)은 영내의 비용을 충당하는 데 활용되었다.

위치 및 변천

부산진은 경상도 동래현 부산포에 설치되었다. 부산진의 설치 시기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우선 세종대 좌도수군도안무처치사(左道水軍都按撫處置使) 본영(本營)을 처음 부산포에 두었다. 그리고 성종대의 기록에서 부산진첨절제사의 관직명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부산진첨절제사였던 설순조(薛順祖)가 부산포에 주진(主鎭)을 설치해달라고 요청한 내용을 통해서 아직 진영이 설치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성종실록』 14년 11월 13일).

부산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중종대의 기록이다. 영사(領事)윤인경(尹仁鏡)은 부산진이 동래현에 소재하고 있고 수사(水使)가 오가며 방어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해당 지역이 피폐해졌으므로 국가 차원의 회복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건의했다(『중종실록』 39년 4월 20일). 윤인경의 언급을 통해 동래현에 부산진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부산진은 성종과 중종의 재위기 사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처음으로 공성했던 곳이다. 부산진성의 책임자였던 첨사정발(鄭撥)은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가오는 대규모 선단을 보고도 왜인들의 무역선인 세견선(歲遣船)이라 착각하여 방어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말았다. 뒤늦게 이들의 정체가 조선을 침입하는 적군임을 파악하고 돌아와서 방어하고자 했지만 그가 돌아오기 전에 왜군 선봉부대의 절반 이상이 이미 부산성을 오르고 있었다. 정발은 군사를 이끌고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왜군에게 사로잡혀 잔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다음 날에는 동래성이 함락되었고, 왜군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김해(金海)·밀양(密陽) 등을 공격해 함락했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근 2백여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냈기 때문에 여러 군현이 풍문만 듣고서도 놀라 스스로 무너졌다고 한다(『선조실록』 25년 4월 13일)(『선조실록』 25년 8월 7일).

부산진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임진왜란 때의 부산포 해전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붕괴되었던 경상도의 수군과는 달리 이순신이 지휘했던 전라좌수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특히 안골포 해전과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둬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1592년(선조 25) 9월 1일 전라우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전함들과 함께 화준구미(花樽龜尾)·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절영도를 공격해 왜선 24척을 격침하고 부산포까지 진격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왜선 470여 척이 배치되어 있던 부산포 내항으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돌진해서 왜선 100여척을 격파했다. 왜군은 육지의 산으로 도망가 총포와 화살 등을 쏘며 저항했다. 이순신은 육상전은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퇴각했다. 이 전투 이후 왜군은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가급적 피하고 육상전 중심으로 전투방식을 바꿔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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