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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7 기준 최신판



인조 때부터 정조 즉위년까지 소현세자와 그의 비인 강빈(姜嬪)의 신주를 모신 사당.

개설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신주를 순회묘(順懷廟)에 합사하게 하였는데, 당시 순회묘는 경복궁의 동북쪽에 있었으며 3칸 규모였다. 원래 순회묘에 모셨던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공회빈(恭懷嬪)의 신주는 1678년(숙종 16) 10월 16일에 무덤으로 옮겨졌고, 1718년(숙종 44) 5월 11일에는 강빈의 신주가 소현묘(昭顯廟)에 함께 모셔짐으로써 소현묘는 명실상부한 소현세자와 강빈의 사당이 되었다가 1776년(정조 즉위) 4월 12일에 소현세자와 강빈의 신주가 묘소로 옮겨져 묻히면서 사당으로서의 소현묘의 기능은 정지되었다.

위치 및 용도

영조 연간에 제작된 『경도오부(京都五部)』에 의하면 소현묘로 이용된 영경전(永慶殿)은 경복궁의 동북 방향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소현세자와 강빈의 사당으로 이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소현세자는 인조의 적장자였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645년(인조 23) 4월 26일 창경궁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다(『인조실록』23년 4월 26일). 소현세자의 장례를 거행하기 위해 명종의 왕세자였던 순회세자의 전례에 의거해 빈궁도감(殯宮都監), 예장도감(禮葬都監), 혼궁도감(魂宮都監)이 설치되었다.

빈궁도감은 소현세자의 장례가 치러지기 전까지 신주를 모신 빈소였고, 혼궁도감은 장례 후 3년 상이 끝날 때까지 신주를 모실 사당이었다. 국왕의 경우에는 혼전(魂殿)이라고 하였는데, 그보다 격을 낮추어 혼궁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소현세자의 혼궁은 인왕사 근처에 있던 인경궁(仁慶宮)의 중휘당(重暉堂)으로 결정되었다(『인조실록』23년 5월 3일). 소현세자의 삼년상이 끝날 즈음 예조(禮曹)에서는 삼년상 후 소현세자의 사당을 어느 곳으로 할지 문의하였는데, 그때 인조는 따로 사당을 만들지 말고 순회묘에 합사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25년 2월 4일).

명종의 왕세자였던 순회세자의 장례는 세조 때 세자였던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전례에 따라 거행되었고 따로 사당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조가 순회세자의 빈인 공회빈의 장례 중 임진왜란을 맞아 혼궁에 신주를 남겨둔 채 피난하였다가 돌아온 후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사당을 짓게 하였다(『선조수정실록』 36년 3월 1일). 당시 순회세자의 신주에는 ‘순회세자 휘모(諱某) 신주’라고 썼고, 공회빈의 신주에는 ‘공회빈 성모(姓某)’라고 썼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세자, 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은 묘(廟)로, 무덤은 묘(墓)로 불렸는데 이 같은 묘묘(廟墓) 제도가 영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소현세자의 무덤은 소현묘(昭顯墓), 사당은 소현묘(昭顯廟)로 불리게 되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사당인 소현묘를 순회묘에 합사하게 하였던 것이며, 당시 순회묘는 경복궁의 동북쪽에 있었으며 3칸 규모였다. 이에 소현세자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한 칸을 더 증축하였다. 증축된 공간은 서쪽에 높은 위계를 배치한다는 서상(西上)의 원칙에 의해 동쪽에 있었으며, 증축된 공간에 소현세자의 신주가 봉안되었다. 소현세자의 신주는 순회세자의 전례에 따라 ‘소현세자 휘모(諱某) 신주’로 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같은 소현세자의 사당은 순회세자의 전례를 따라 별도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소현묘(昭顯廟)로 하였다.

한편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신주는 1678년(숙종 16) 10월 16일에 무덤으로 옮겨져 묻혀 졌다.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4대가 지났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사당이자 소현세자의 사당이었던 이곳은 순수하게 소현세자의 사당인 소현묘가 되었다. 이어 1718년(숙종 44) 4월 8일에 소현세자의 빈인 강빈이 신원되었고, 5월 11일에는 강빈의 신주를 소현묘에 함께 모시게 되었다(『숙종실록』44년 5월 11일). 1776년(정조 즉위) 4월 12일에 정조는 순회세자의 전례에 따라 소현세자와 강빈의 신주를 묘소에 묻게 하였다. 이에 따라 소현묘는 사당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었고 명칭이 영경전(永慶殿)으로 바뀌었다.

형태

소현묘로 쓰이기 전에 이 사당은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사당으로 쓰였는데, 당시에는 3칸 건물이었다. 3칸 중에서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신주는 가운데인 두 번째 칸에 함께 봉안되었고, 의장물로는 도장을 넣는 갑인 인갑(印匣) 하나, 햇볕을 가리는 일산(日傘) 하나가 있었다. 여기에 소현세자의 신주를 추가로 모시기 위해 동쪽에 한 칸을 증축하여 4칸이 되었는데, 숙종 연간에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신주가 옮겨지고 대신 강빈의 신주가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4칸 중에서 소현세자와 강빈의 신주를 한 칸에 모셨는지 아니면 별도의 칸에 모셨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사당으로 이용되던 소현묘는 정조 연간에 소현세자와 강빈의 신주가 묘소(墓所)로 옮겨져 매안됨으로써 사당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세자와 세자빈의 사당에서는 철마다 한 번씩 드리는 제사인 사시사(四時祀)와 기일마다 지내는 기제(忌祭)를 지내다가 4대가 흘러 신주를 묘소에 옮겨 묻으면서 묘소에서 한식날에 지내는 한식제(寒食祭)만 거행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도오부(京都五部)』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소장등록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소장의궤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koreanhistor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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