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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6 기준 최신판



평양성 내성(內城)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장소로 이용되던 장대(將臺).

개설

만수대(萬壽臺)는 평양성 내성의 고지대에 위치하여 성내를 지휘하던 장수의 장대이다. 평양성은 북쪽의 가장 높은 모란봉(牡丹峰)을 중심으로 을밀대(乙密臺)·현무문(玄武門)·부벽루(浮碧樓)를 연결하는 북성(北城)과 만수대·주작문(朱雀門)·대동문(大同門)을 연결하는 내성, 내성의 남쪽으로 대동교(大同橋)에서 안산(按山)까지 연장된 중성, 저지대인 대동강과 보통강(普通江)으로 둘러싸인 평지의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치 및 용도

만수대는 평양성의 대동문 아래에서 서북쪽으로 남산 고개를 지나 내성이 끝나는 곳에 위치하였다. 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錦繡山)의 최고봉인 최승대(最勝臺)와 청류벽(淸流壁)의 절벽을 끼고 있으며 동서남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흐르고 있어 산과 평야, 강을 아우르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격하는 방향에 따라 남쪽에서 보면 산을 등지고 있는 평지성이고, 북쪽에서 보면 만수대와 여러 장대들이 연결된 산성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 평양부 성지조(城池條)에는 장대오처(將臺五處)라고 하여 전영(前營)인 손승대(選勝臺), 좌영(左營)인 납승대(納勝臺), 중영(中營)인 집승대(集勝臺), 우영(右營)인 공승대(控勝臺), 후영(後營)인 최승대가 있었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고구려시대에 축조된 장대들이 그대로 유지되어 평양성 방어 시설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화성(華城)과 남한산성의 장대와 유사한 모습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909년(융희 3)) 순종이 서울에서 평안도로 임시 특별열차를 이용해 서순행(西巡幸)을 거행하였다. 1월 31일 순종은 정주를 지나 평양에 도착해 행재소에서 경숙(經宿)하였다(『순종실록』 2년 1월 31일). 2월 1일에 순종은 평원당(平遠堂)에서 지역 관료와 민인 등 100여 명을 만난 뒤(『순종실록』 2년 2월 1일) 만수대에 올라가 평양의 풍경을 관람하고 돌아왔다(『순종실록』 2년 2월 1일). 당시 순종은 궁내부 시종 및 총리이완용과 내각 관료,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통감부 관료 등을 대동하였다.

1895년(고종 32)에는 청일전쟁의 여파로 만수대의 주변 삼림이 황폐해졌다. 당시 평양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을 위해 만수대애도비(萬壽臺哀悼碑)가 세워졌는데, 1902년(광무 6) 7월 평안도관찰사가 한국인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이전을 요구했다. 1908년(융희 2)에는 천도교 주최로 만수대에서 설교회가 열렸는데, 1만 3,000여 명이 운집하였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동아일보(東亞日報)』 1926년 9월 14일.
  • 『황성신문(皇城新聞)』 1908년 2월 14일.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권3, 1988.
  • 강명숙, 「한일합병 이전 일본인들의 평양 침투」, 『국사관논총』 107, 2005.
  • 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西巡幸 연구-西巡幸日記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31, 2011.
  • 小泉顯夫, 「第六 平壤萬壽臺及其附近の建築物址」, 『昭和十二年度古蹟調査報告』,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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