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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4 기준 최신판



함경도 갑산군 인차외(仁遮外)에 설치한 보.

개설

인차외보는 함경도 갑산군의 요충지인 인차외에 설치한 구자보(口子堡)였다. 구자보는 작은 규모의 방어시설을 말한다. 세종대 도체찰사황보인이 조사하여 정하였던 것을 단종대에 폐지했다가 성종대 다시 만호보가 되었다. 황보인이 그곳에 돌로 보루를 쌓았고, 갑산군의 토병이 있었다.

위치 및 용도

인차외보는 적로(賊路)의 요충지이다. 적생동(赤生洞)이 그와 가깝다. 혜산(惠山)과 갑산(甲山)의 도로와 현격하게 멀고 험해서 인물(人物)이 쉽게 통할 수 없기 때문에 간혹 부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도망가기도 했다. 삼수(三水)와도 서로 거리가 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갑산군의 동쪽 85리(약 35㎞)에 있었으며, 국경지대의 적을 방비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지세가 험해서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없었는데, 간혹 부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도망가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1443년(세종 25) 9월 도체찰사 황보인이 갑산(甲山)·삼수(三水)에서 평안도 지경의 고미평(古未平)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살펴서 가파지보(加波地堡)와 인차외보(因車外堡)를 정하였다. 종9품의 무관직인 권관을 두었다(『세종실록』 25년 9월 20일). 1454년 인차외구자를 혁파했다가 1489년에 인차외가 수천여 결 이상의 광할한 지역인 데다가 토질이 비옥하므로 수백여 사람이 경작할 만하다 하여, 함경도 영아전(營衙前) 2백 명과 갑산의 응방(鷹房)에서 매를 기르는 일을 맡아 보던 사람인 시파치(時把赤) 37호를 이주시켜 농사를 지으면서 지키게 하여 영구히 그 지역의 병졸로 삼고, 다시 그 보를 인차외라 하고 종4품의 무관직인 만호(萬戶)를 파견하도록 하였다. 1492년(성종 23) 인차외만호는 의흥위(義興衛)·용양위(龍驤衛)·호분위(虎賁衛)·충좌위(忠佐衛)·충무위(忠武衛) 등의 5위에 딸린 종9품의 무관직인 부사용(副司勇)에서 차출하도록 했다. 1493년 4월 인차외보와 삼수와의 사이에 나애보만호(羅曖堡萬戶)를 설치했다. 나애보에서 인차외보까지는 거리가 30여 리(약 12㎞)이고, 삼수군까지는 40여 리(약 16㎞)이다(『성종실록』 24년 4월 19일).

형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돌로 쌓은 보루로, 그 둘레가 2,400자(약 727m), 높이가 9자(약 3m)에 이르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72년(영조 48) 당시 인차외보를 포함해 나난보(羅暖堡)·구갈파지보(舊乫坡知堡)·신갈파지보(新乫坡知堡)·소농보(小農堡)·자작보(自作堡)의 여섯 보의 변장은 보의->에 소속된 병졸의 수효를 살핀 뒤 빠진 사람에게는 장형 대신에 속전을 받았는데, 이때의 속전은 1전(錢)삼(蔘)이었다(『영조실록』 48년 7월 7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