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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4 기준 최신판



1795년 윤2월에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됨에 따라 1794년에 건설된 금천행궁이 시흥행궁으로 개칭됨.

개설

양주 배봉산에 소재하던 사도세자의 무덤 즉 영우원(永祐園)은 1789년(정조 13) 10월에 화성의 구 읍치로 이장되었고 이름 역시 현륭원(顯隆園)으로 바뀌었다. 이후 정조는 매년 현륭원에 행차하였다. 그런데 궁궐에서 현륭원으로 가기 위해 이용하던 과천 노선이 험준하여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에 1794년(정조 18)부터 과천 노선 대신 상대적으로 평탄한 금천(衿川) 노선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따라 1794년(정조 18) 4월 2일에 금천행궁을 건설하기로 결정되었다.(『정조실록』18년 4월 2일) 이후 1795년(정조 19) 윤2월 1일에 금천현(衿川縣)이 시흥현(始興縣)으로 바뀌면서 금천행궁 역시 시흥행궁으로 바뀌었다.(『정조실록』19년 윤2월 1일)

위치 및 용도

시흥행궁은 정조 이후 국왕이 화성에 위치한 사도세자의 현륭원과 정조의 건릉(健陵)에 가면서 거쳐 가던 곳으로 국왕의 행행 시에 이용되던 행궁이다. 그러나 시흥행궁은 현재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그 위치는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흥현지도』에 의하면 관악산 호압사(虎壓寺) 아래에 시흥행궁과 객사(客舍), 사창(司倉)이 나란히 있으며 그 동남쪽으로 향교가 표기되어 있다. 또 지도상 향교의 아래, 즉 남서쪽으로는 사직단이 있어 당시 시흥현 관청의 소재지를 추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시흥행궁에는 ‘간좌(艮坐)’라고 표시하여 행궁이 간방인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흥현지도’ 상 행궁의 아래, 즉 서쪽으로는 관악산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동에서 서로 흐르고, 도로가 북에서 남으로 나 있다. 이 도로는 정조대 개설된 시흥대로로서 이 도로와 물줄기가 마주하는 곳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으며, 그 남쪽에는 ‘점막(店幕)’이라 표기되어 있어 숙식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99년에 제작된 『경기도시흥군읍지지도』에 의하면 행궁의 규모가 214칸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현재 시흥행궁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상가가 들어서 있다. 이에 따라 시흥행궁의 위치를 정확하게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현재의 카멜리아 쇼핑몰 주변으로 추정된다. 지도 상의 위치와 부합할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800년 수령 이상의 은행나무 세 그루가 잘 보존된 사실 등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시흥행궁은 1795년(정조 19)에 안양 만안교를 돌다리로 개축하고 경기감사서용보가 정조의 현륭원 행차를 위해 행궁을 설치한 것을 그 연원으로 한다. 시흥행궁은 정조의 현륭원 행차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존속하였으나 1858년(철종 8) 실화로 말미암아 소실되었다. 하지만 1868년(고종 5)에 고종이 2천 냥을 내려 보내 안양리 행궁을 철거하여 옮겨 쓰도록 처분했다는 사실에서 고종 초반까지는 행궁과 관아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건된 시흥행궁은 1904년 제2차 시흥농민봉기 과정에서 일부 시설이 훼손되었고, 근현대의 격동기를 겪는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어 현재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형태

현재 시행행궁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의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이다. 이 그림에 의하면 시흥행궁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비교적 넓은 대로에 연결된다. 행궁 입구에는 커다란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행궁 주변을 둘러싸고 삼엄한 호위를 하고 있는 군사들이 보인다. 여기에 묘사된 시흥행궁의 정문은 정면이 3칸에다 가운데 칸은 솟아 있어서 솟을삼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화성행궁이 신풍루, 좌익문, 중양문이라는 세 겹의 문을 통해 정전으로 진입하는 것과는 달리 시흥행궁에는 두 겹의 솟을삼문을 통해 진입하게 되어 있다. 두 겹의 솟을삼문 바로 안쪽에는 ㄱ자형의 커다란 건물이 있고 그 안쪽으로 다시 ㄱ자형의 커다란 건물과 ㅁ자형의 커다란 건물이 나란히 있다. 위치상으로 본다면 두 겹의 솟을삼문 바로 안쪽에 위치한 ㄱ자형의 커다란 건물은 외전에 해당하고, 그 안쪽에 나란히 있는 ㄱ자형의 커다란 건물과 ㅁ자형의 커다란 건물은 내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확정할 수는 없고, 좀 더 분명한 자료를 기다려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시흥행궁은 정조가 살아생전 화성의 현륭원에 행차할 때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후 화성의 건릉으로 대여(大輿)가 갈 때에도 이용되었다. 당시 정조의 재궁(梓宮), 즉 관은 대여에서 윤여(輪輿)로 옮겨진 후 시흥행궁에 설치된 찬궁(攢宮)에 안치되었다. 대여는 국상 때 관을 넣는 큰 상여이며, 윤여는 관을 옮길 때 사용하는 간단한 수레다. 또 찬궁은 관을 넣어두는 작은 집이다.

참고문헌

  • 『日省錄』
  • 『承政院日記』
  • 『園幸乙卯整理儀軌』
  • 『始興還御行列圖』
  • 『始興縣地圖』
  • 서울역사박물관, 『시흥행궁』, 2009.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www.history.go.kr)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시소러스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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