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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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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위봉산성 |
한글표제 | 위봉산성 |
한자표제 | 威鳳山城 |
상위어 | 관방(關防) |
관련어 | 적상산성(赤裳山城)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김순남 |
장소 | 전라북도 완주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위봉산성(威鳳山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1년 11월 23일, 『숙종실록』 29년 7월 28일, 『고종실록』 31년 4월 27일, 『고종실록』 31년 5월 3일 |
전라도 완주군 소양면의 위봉에 쌓은 산성.
개설
1675년(숙종 1) 11월 전라감사권대재(權大載)의 요청으로 축성하였으나(『숙종실록』 1년 11월 23일), 1681년 위급할 때에 지키기 어렵다는 논의가 제기되어 폐기했다. 이후 1703년에는 김제군 관할로 바뀌었다.
위치 및 용도
전라도 완주에 위치하며, 적의 방어를 위해 쌓은 방어시설이다.
변천 및 현황
1407년(태종 7)에 축성하여 1675년(숙종 1)에 중수하였다. 1703년(숙종 29) 7월에는 위봉산성을 김제군 소속으로 변경하였다. 위봉은 처음에 여산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길이 멀고 험하여 여산 백성들이 부역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제가 산성에서 가장 가깝다 하여 소속 변경을 청하게 된 것이다(『숙종실록』 29년 7월 28일).
형태
돌성이며, 『위봉진사례(威鳳鎭事例)』에 의하면, 행궁 6칸, 정자각(丁字閣) 2칸, 군기고(軍器庫)와 군향창(軍餉倉) 등이 있었다고 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94년(고종 31) 4월 동학군에게 전라감영(全羅監營)이 함락당하자, 감사는 교체되어 성에서 나와 서울로 피하여 올라오고 전주판관이 두 전(殿)에 있던 왕의 영정을 위봉산성에 옮겨 모셨다(『고종실록』 31년 4월 27일). 1894년 5월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의 신주(神主)와 어진(御眞)을 임시로 위봉산성 행궁에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1년 5월 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위봉진사례(威鳳鎭事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