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청문(永淸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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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4 기준 최신판



창경궁의 명정전 북쪽 월랑에 있는 작은 문.

개설

영청문(永淸門)은 명정문, 광정문과 함께 명정전 권역에 있는 작은 문으로 정전 마당을 둘러싸는 북쪽의 행각 즉, 월랑에 있는 문이다. 원래는 행각 안에 방·부엌·마루·창고 등의 부속실들이 가득 차 있었으나, 지금은 열주랑으로 이어진 빈 공간의 월랑으로만 이루어졌다.

영청문의 ‘영청(永淸)’의 의미는 오랫동안 맑은 세상을 염원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이 문의 액호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 왕이 정치하는 공간이 맑고 깨끗한 장소이기를 바라서 지어진 이름일 것이다.

위치 및 용도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궁궐은 남쪽을 바라본다는 궁궐 제도와 다르게 영건되었다. 창경궁이 지어지던 때에 성종은 신하들에게, 이 궁궐은 왕을 위한 곳이 아니라 대비(大妃)들을 위해 마련된 장소인 만큼 남쪽을 바라보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창경궁의 명정전도 다른 궁궐의 예와 마찬가지로 조정 마당을 두었고 행각이 마당을 빙 둘러싸 궁궐 법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동행각에는 명정전과 마주 선 정문인 명정문이 서 있고, 영청문은 북행각 사이에 있고, 광정문은 남행각에서 영청문과 마주하고 있다.

정조는 창경궁 동쪽에 아버지의 사당인 경모궁을 새로 마련하고 자주 참배하였으며, 그 때문에 창경궁의 동쪽 담장에 월근문을 설치했다. 정조는 참배를 위해 거둥할 때 대개 영청문을 경유하여 월근문으로 나가 경모궁에 참배하였고, 같은 동선으로 다시 돌아왔다.

변천 및 현황

창경궁은 성종 때 3명의 대비를 위해 조성된 궁이었기 때문에 정전인 명정전의 규모가 근정전이나 인정전과는 다르다. 명정전의 행각은 지금의 열주랑으로 죽 이어진 월랑의 형태와 달리, 행각을 구성하는 부속채들이 복합적인 공간 구성을 하고 있었다. 명정문이 있는 동행각은 측면 2칸이 모두 빈 공간으로 쭉 연결된 월랑이었고, 남행각은 부속실로 꽉 채워졌다. 북행각은 2칸 모두 부속실로 채워졌거나, 안쪽 1칸은 빈 공간인 월랑으로, 바깥쪽 1칸은 창고로 쓰는 방을 둔 복합적인 행각이었다. 영청문은 북행각의 반 월랑 반 행각으로 이루어진 명정전 쪽과 모두 행각으로 구성된 명정문 쪽의 행각이 나뉘는 곳에 놓였다. 1900년대 초까지는 행각도 영청문도 남아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었다가 1986년에 복원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바뀌었다.

형태

행각 사이에 평문으로 조성되어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을 달았고, 문의 위쪽에는 안상의 문양대로 구멍을 낸 풍혈을 갖춘 궁판 3칸이 놓였으며, 그 위에 홍살을 두었다. 아름답게 장식한 영청문 편액이 걸려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95년(정조 19) 4월에 수원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에 맞춰 성대히 거행하고 궁으로 돌아왔지만, 정조는 막상 혜경궁 홍씨의 탄생일인 6월 18일을 기념하지 않을 수 없어 조촐한 연회를 베풀었다. 내명부들을 포함한 잔치는 연희당에서 있었지만 내연이 열리는 잔치 공간에 신하들은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명정전의 동쪽 곁채와 북쪽 곁채, 광정문 안과 영청문 안에서 외정의 신하들에게 차례대로 위계를 맞춰 상을 내리고 대접하였다(『정조실록』 19년 6월 18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문화재청 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 문화재청,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정밀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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