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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4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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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방야 |
한글표제 | 방야 |
한자표제 | 放夜 |
관련어 | 답교(踏橋), 도액(度厄), 상원(上元) |
분야 | 생활·풍속/풍속/행사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최진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방야(放夜)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 15년 5월 6일, 『영조실록』 47년 1월 15일 |
정월 대보름날 답교놀이를 위해 성문을 열어 통금을 해제하는 것.
개설
대보름날 밤에는 의금부(義禁府)에서 답교(踏橋) 놀이를 위해 성문을 열어 통금을 해제한다. 이날 밤에 지역 내에 있는 여러 개의 다리를 밟고 돌아다니면, 한 해의 재액을 면하고 또 다리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어 행하던 풍속이다.
연원 및 변천
답교놀이는 정월 대보름날에 하는 풍속으로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고, 그 연원은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와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육계굉(陸啓浤)의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와 심방(沈榜)의 『완서잡기(宛署雜記)』를 인용해 상원(上元)과 16일 밤에 부녀들이 액을 막기 위한 의도로 밤에 다리를 건너 다녔다고 한다. 우리도 그 영향을 받아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답교놀이를 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놀이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행해졌는데, 이날은 왕명으로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였다.
그러나 1560년(명종 15) 답교놀이를 위해 밤을 지새우며 남녀가 혼잡하게 모여 있고 또한 싸우기도 하는 등 폐해가 발생하여 명종이 사헌부(司憲府)에 명을 내려 금지시켰다(『명종실록』 15년 5월 6일). 『지봉유설』에는 대보름날의 답교에 남녀의 행렬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아 이를 금하자 이후 부녀자들이 다시 답교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1560년에 금지되었던 답교놀이가 영조·정조대에 들어서는 허용되었다. 1771년(영조 47) 왕이 답교놀이를 위해 의금부에서 밤에 통행금지를 해제[放夜]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는데(『영조실록』 47년 1월 15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답교놀이는 전국적으로 성행했던 듯하다. 『열양세시기(列陽歲時記)』에는 정월 대보름날에 열두 다리를 건너면 열두 달 동안의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재상과 귀인부터 촌민에 이르기까지 나오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이날 음악과 술판이 벌어졌으며, 연중 4월 초파일과 함께 도시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날이기도 하였다. 『동국세시기』에도 서울에서는 답교놀이를 위해 서울 지역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또한 밤새 피리를 불고 북을 연주 하는 등 떠들썩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 놀이를 온 백성이 즐겼을 것이라 짐작된다.
절차 및 내용
방야는 답교놀이를 위해 달빛 아래 그 지역 내에 있는 다리 여러 개를 밟으며 밤새 돌아다닐 수 있도록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것을 말한다. 『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에 의하면 온 도성의 사람들이 모두 종가(鐘街: 현 종각)로 나와 종소리를 들은 뒤에 여러 곳의 다리로 흩어져 답교놀이를 하는데, 그 행렬이 밤을 새워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였다. 서울에서는 대광통교(大廣通橋)·소광통교(小廣通橋)와 수표교(水標橋)를 중심으로 가장 성행하였다고 한다. 다리를 건널 때는 짝을 지어 건넜는데 이는 곧 도액(度厄)이라 하여 액을 막는다는 믿음에 의해 행해졌다.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이 악기를 부는 등 그 모습이 어수선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울 지역에서는 열두 다리를 모두 밟아야만 다리병과 액운을 면할 수 있다고 알려져 그 행렬이 밤새도록 이어졌을 것이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이 놀이는 한 해에 다리 병이 없고 또한 액운을 면할 수 있다고 하여 정월 대보름날 밤 혹은 그다음 날 밤에 밤새 거리를 돌아다니며 즐겁게 놀았다. 민간에서는 다리 밟기를 한 뒤 자기가 입고 있는 저고리의 동정을 뜯어서 엽전을 싸서 다리 한구석에 놓아두거나, 다리 아래로 던지면 건강하고 무병하여 장수한다는 속신도 존재한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다리병과 관련된 내용은 다리[橋]와 신체의 다리[脚]가 그 음이 비슷해 답교놀이를 하면 1년 동안 다리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속담에서 유래해 그러한 속설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명나라의 유생인 우혁정(于奕正)의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모든 병을 물리친다[走百病]는 속설에 의해 정월 대보름날에 밤새 걸어 다녔다고 한다. 그러한 속신이 조선에도 전래되어 다리나 재액만을 쫓는 게 아니라 만병이 치료된다는 믿음으로 이어진 듯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도잡지(京都雜誌)』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무명자집(無名子集)』
- 『북경세화기(北京歲華記)』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완서잡기(宛署雜記)』
-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
- 『지봉유설(芝峯類說)』
- 『홍재전서(弘齋全書)』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삼국·고려시대편』,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신문·잡지편(1876~1945)』,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전기 문집편』, 2004.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후기 문집편』, 2005.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현대신문편(1946~1970)』, 2006.
- 이두현 외, 『한국 민속학 개설』, 일조각, 1996.
- 임동권, 『한국 세시풍속 연구』, 집문당, 1984.
- 김명자, 「한국 세시풍속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