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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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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태일초제 |
한글표제 | 태일초제 |
한자표제 | 太一醮禮 |
동의어 | 태일초(太一醮) |
관련어 | 태일(太一), 태일전(太一殿) |
분야 | 문화/종교/도교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초기 |
집필자 | 김철웅 |
시행시기 | 상원일(上元日), 중원일(中元日), 하원일(下元日), 입춘, 입하, 입추, 입동 |
시행기관 | 태일전(太一殿) |
시행장소 | 한양, 통주(通州), 의성(義城), 태안(泰安)의 태일전(太一殿)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태일초제(太一醮禮) |
고려와 조선시대에 태일(太一)에 지내는 도교의 초례.
개설
태일은 태일구궁(太一九宮)으로 태을(太乙)이라고도 하며, 북신(北辰)의 신명(神名)으로 전쟁, 전염병 따위를 다스린다고 믿어 이에 대해 초례를 지냈다. 이를 태일초, 태일초례라 한다.
연원 및 변천
태일은 중국 한(漢) 나라 때부터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태일은 태일구궁(太一九宮)으로 태을(太乙)이라고도 하며, 북신(北辰)의 신(神)이었다. 태일은 45년을 주기로 건방(乾方)에서 간방(艮方)으로 그리고 손방(巽方), 곤방(坤方)으로 옮기는데, 그때마다 해당 지역에는 태일전이 건립하고 태일초례를 거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간방인 화령(和寧), 손방인 충주(忠州), 곤방인 부평(富平), 건방인 귀주(龜州)에 태일전을 두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통주(通州), 의성(義城), 태안(泰安) 등에 태일전을 두고 태일초례를 거행하였다.
절차 및 내용
(1) 초례의 의미와 절차
도교 제례는 흔히 ‘재(齋)’, ‘초(醮)’, 혹은 ‘재초(齋醮)’라고도 한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도교 제사를 ‘재’라 칭하였고 ‘초’라고는 하지 않았다. 초가 도교 의식이 된 것은 수대(隋代)에 이르러서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재’는 거의 보이지 않고, 보통 ‘초’, ‘초례(醮禮)’라는 이름으로 거행되었다.
『수서(隋書)』「경적지」에 의하면, "한밤중에 여러 성신(星辰) 아래에서 술·포·면·음식·폐백을 진설해 놓고 천황(天皇)과 태일(太一)에게 제사하고 오성(五星)과 여러 별에게 제사하며 상장(上章)하는 의식과 같이 글을 만들어 아뢰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초(醮)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초례는 밤중에 여러 제물을 차려 놓고 기원문인 청사(靑詞)를 올렸다.
(2) 태일초례의 거행 목적
『동국이상국전집』의 「태일초례문(太一醮禮文)」에, "때 아닌 재앙을 내림은 하늘이 앞일을 경계하심이고, 정성껏 제사를 받들면 신은 반드시 복을 주기 마련이라 부디 돌아보아 흠향하시고 빨리 이상한 재변을 없애 주소서."라고 태일초례를 지냈다. 그리고 권근의 「비를 비는 태일 초례 청사문[祈雨太一醮禮靑詞文]」, 변계량의 「소격전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겸하여 유성의 재앙을 물리치는 태일 초례의 삼헌 청사[昭格殿行祈雨兼流星祈禳太一醮禮三獻靑詞]」, 황계옥(黃啓沃)의 「태일초기우청사(太一醮祈雨靑詞)」를 보면 태일초례는 천재지변의 기양을 위해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의 태일초례는 주로 소격전에서 거행되었다. 1393년(태조 2년) 11월 20일에 얼음이 얼지 아니하고 또 안개가 끼었다는 이유로 소격전에서 태일초례를 열어 기후가 순조롭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소격전에서 태일초례를 행하여 비 오기를 빌었다.
(3) 제사일과 절차
1409년(태종 9) 12월에는 태일초의 제일(祭日)을 정비하여 상원(上元), 중원(中元), 하원(下元)의 삼원일(三元日)과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의 사립일(四立日)에 태일초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통주(通州)의 태일초례는 매월 삭망에 행하던 것을 삼원일에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거행하도록 하였다.
소격서에는 태일전에 있었고, 태일초에는 『태일경(太一經)』을 읽었다. 제사 절차는 『용재총화』에 따르면 헌관(獻官)과 서원(署員)은 모두 흰 옷에 검은 두건으로 재를 올렸고, 또 관(冠)을 쓰고 홀(笏)을 들고 예복을 입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전(祭奠)은 과실·인절미·차(茶)·과자·술이며 분향(焚香)하고 백배(百拜)을 올렸다. 초례에 참여한 도사(道士)는 머리에 소요관(逍遙冠)을 쓰고 몸에는 얼룩얼룩한 검은 옷을 입었으며, 경쇠[磬]를 24번 울리고 난 뒤에, 두 사람이 도경(道經)을 읽고 또 축사(祝辭)를 푸른 종이에 써서 불사른다고 한다.
의의
태일이 천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태일초례는 제천 의례의 하나로 거행되었다. 따라서 제천 의례의 주관자인 국왕은 초례를 통해 천신에게 기원함으로써 천명을 받은 통치자로서 권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차주환, 『한국의 도교사상』, 동화출판공사, 1984.
- 김철웅, 『한국중세의 길례(吉禮)와 잡사(雜祀)』, 경인문화사, 2007.
- 양은용, 「고려도교사상의 연구」, 『원광대학교논문집』19,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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