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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8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친잠례 때 왕비가 누에고치인 견(繭)을 거두던 의식.

내용

수견식(收繭式)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누에고치인 견을 거두는 의식이다. 누에는 누에나방과에 속하는 유충으로서 한자어로는 잠(蠶), 천충(天蟲), 마두랑(馬頭娘)이라 하였다. 누에는 오래전부터 길러왔기 때문에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를 묘, 아직 검은 털을 벗지 못한 새끼를 의자(蟻子), 세 번째 잠자는 것을 삼유(三幼), 27일 된 것을 잠로(蠶老), 늙은 것을 홍잠(紅蠶), 번데기를 용(蛹), 성체를 아(蛾), 고치를 견, 누에똥을 잠사(蠶砂)라 하였다.

누에가 고치를 지어 성견(成繭)이 되면 고치를 거두고 씨고치를 갈무리하는 의식인 수견의(受繭儀)가 있었다. 1767년(영조 43) 5월에 작성된 『장종수견의궤(藏種受繭儀軌)』에 의하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견 의식은 5월 26일에 덕유당(德遊堂)에서 행하여졌고, 백관의 진하(陳賀)는 5월 29일에 숭정전(崇政殿)에서 거행되었다. 수견 의식은 다음과 같이 거행되었다. 하루 전에 상침(尙寢)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왕의 자리를 편전(便殿) 북쪽 벽 약간 동쪽에, 왕비의 자리를 전내 북쪽 벽 약간 서쪽에 모두 남쪽을 향하여 배설하였다. 향안(香案) 둘은 전(殿) 밖 좌우에 위치하였다. 왕세손빈 이하 명부(命婦)의 배위는 전정(殿庭)의 길 좌우에 설치하였다. 그날 상공(尙功)이 죽상(竹箱)에 누에고치를 담아서 안상(案床)에 두었다. 행사가 거행되기 3각, 약 45분 이전에 명부는 각기 예복(禮服) 차림으로 모이고 2각, 약 30분 전에는 왕세손빈 이하가 예복을 갖추고 자리로 갔다. 행사 시각이 되면 상의(尙儀)가 왕 앞에 꿇어앉아 ‘중엄(中嚴)’을 계청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외판(外辦)’을 아뢰면 왕은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나오는데,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였다. 왕이 자리에 오르면 왕비가 예복을 입고 상궁의 인도를 받아 자리에 올랐다. 왕과 왕비가 자리에 오르면 왕세손빈 이하 명부는 국궁, 사배, 흥, 평신의 예를 올렸다. 이후 상공이 누에고치를 담은 죽상을 받들어 왕의 자리 앞으로 나아가 왕에게 들어 보이면 왕이 누에고치를 친견하였다. 이어서 상공은 죽상을 가지고 왕비 자리 앞에 나아가 올렸다. 왕비는 서서 누에고치를 친견한 후, 죽상을 받아 상의에게 전해 주었다. 상의는 상복(尙服)에게 주어 보관시켰다. 이후 친잠 과정에서 수고한 관계자들을 왕비가 위로하고 선물을 하사하는 과정으로 수견식은 끝났다.

용례

1909년 순종의 황후인 윤비가 여러 명부를 거느리고 창덕궁의 잠실에서 수견식을 거행하였다(『순종실록』 2년 6월 21일).

참고문헌

  • 『친잠의궤(親蠶儀軌)』
  • 『장종수견의궤(藏種受繭儀軌)』
  • 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 박소동, 「친경친잠의궤 해제」, 『국역친경친잠의궤』, 민족문화추진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