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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5 기준 최신판



말의 조상인 천사방성(天駟房星)에게 드리는 제사의 의식.

개설

마조는 전근대기에 말, 그중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기병(騎兵)을 양성할 필요성에 따라 시행된 제사이다. 한양 근교의 살곶이 목장[箭串牧場]에 그 제단(祭壇)이 있었다.

마조는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 소사(小祀)의 등급으로 수록되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도 그 등급이 유지된 상태로 국가의 사전(祀典)에 포함되었다. 마조의 제사의식은 1414년(태종 13)에 처음 마련되었고, 이후 그 제사는 3품의 관원이 헌관(獻官)으로 임명되어 시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제사는 조선초기 기병을 군사력의 중심으로 삼은 상태에서 군마(軍馬)를 번성시키려는 의식과 연결되어 시행된 것인데, 16세기 이후 기병의 전투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제사의 시행 기록이 나타나지 않았고, 18세기에 이르러 국가 제사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연원 및 변천

마조의 제사는 중국사에서 이미 당나라 때부터 나타나고 있다. 국가 사전의 등급은 소사였는데, 송나라와 명나라를 거치면서도 그 상황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그 명칭이 나오지 않아 시행 여부를 알 수 없지만 『고려사』에는 1046년(고려 정종 12) 마조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고려사』「예지」 길례조에는 마조의 제사 의식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마조의 제단은 넓이가 9보(步), 높이가 3자(약 0.9m)로 4면에 섬돌[陛]이 있고, 담장인 유(壝)는 25보에 이르며, 제사가 끝난 후 폐백을 태우는 요단(燎壇)이 별도로 존재하였다. 제사는 2월의 길일에 돼지 1마리를 희생(犧牲)으로 삼아 담당 관원이 시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 마조의 제사는 1413년(태종 13)에 소사로 설정되었고, 다음 해 한양에 새로운 제단이 마련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때 마조제의 등급 및 제단의 규모는 고려시대와 동일하였다. 그런데 1414년 이후부터 세종 초반기 어느 시점에 마조단의 규모는 제후국의 체제에 맞추어 사방 2장 1자(약 3.3m), 높이가 2자 5치(약 0.7m), 1유의 형태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규모는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마조의 제사 의식은 1414년(태종 14)에 처음 제정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태종실록』 14년 9월 8일) 구체적인 내용은 수록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마조의 제사 의식은 세종 사후에 편찬된 『세종실록』「오례」 길례 의식에 ‘사마조의(祀馬祖儀)’로 나타나는데, 그 내용은 태종대의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후 이 의식은 『국조오례의』에 거의 그대로 실렸는데, 조선후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16세기 이후 마조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기병의 수요 및 비중이 약화되면서 마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이 상황은 이어졌다. 물론 현종대에 마조 제사의 복구를 꾀했던 사례가 나오고(『현종실록』 10년 2월 23일), 영조대에도 한 차례 마조단에서 제례 의식을 시행한 사례가 있지만(『영조실록』 8년 2월 20일), 이것 외에는 기록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이 반영되어 영조대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는 마조제가 현재 시행되지 않아서 폐지되었다고 기록되었고, 정조대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마조제가 현재 폐지되었다며 그 의식인 ‘사마조의’는 의주(儀註)조차 수록하지 않았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마조의 제사는 소사의 등급으로 3품의 관원이 헌관으로 임명되어 시행하는데, 시기는 음력 2월인 중춘(仲春)의 중기후(中氣後) 강일(剛日)의 길일이었다. 제관(祭官)의 재계(齋戒)는 소사의 격에 맞추어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 등 3일 동안 이루어졌다. 산재는 제관이 치재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삼가는 것으로, 일상 업무는 정상적으로 수행했으며 평소의 자기 집의 침소에서 잤다. 치재는 산재 이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재계하는 것으로, 치재 기간에는 전적으로 제사에 관련된 일에만 전념하였다. 사용되는 희생은 돼지 1마리로, 제사 전날에 헌관이 희생과 제기를 검사하였다.

제사는 시행 전날부터 당일 제례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제수 및 참여 인원의 자리 등을 마련하는 준비 절차를 거친 뒤 헌관이 자리에 나가면서 시작된다.

의식 절차는 4단계로 구성된다. 먼저 헌관이 신위에게 폐백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가 시행된다. 전폐례는 헌관이 3차례에 걸쳐 향불을 피운 후 폐백을 신위에게 올리고, 그 뒤에 부복(俯伏)하는 3개의 세부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2단계는 헌관이 3차례 신위에게 술을 올리는 헌례(獻禮)이다. 먼저 헌관이 술잔을 올린 뒤 몸을 구부렸다가 일으키면[俯·伏興],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고, 이후 헌관을 몸을 구부렸다가 일으켜 펴는[俯伏·興·平身] 4동작의 초헌례를 시행한다. 끝나면 헌관이 다시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와 마지막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례를 이어 시행하는데, 여기서는 축문을 읽는 과정이 없다. 3단계는 헌관이 신위에게 올렸던 술과 고기를 맛보는 음복(飮福)과 수조(受胙)의 과정이다. 4단계는 마무리 과정이데, 집사(執事)가 변(籩)과 두(豆)를 거두면, 헌관이 폐백 태우는 것을 지켜보는 망료(望燎) 이후 신위판을 봉안한 뒤 헌관 이하가 퇴장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김철웅, 『한국중세의 길례와 잡사』, 경인문화사, 2007.
  • 논총간행위원회, 『동봉신천식교수정년논총』, 경인문화사, 2005.
  •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 연구』, 일조각, 1991.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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