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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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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삼복 |
한글표제 | 삼복 |
한자표제 | 三伏 |
상위어 | 복납(伏臘), 세시복납(歲時伏臘) |
하위어 | 말복(末伏), 중복(中伏), 초복(初伏) |
동의어 | 복(伏), 복일(伏日), 삼경(三庚) |
관련어 | 개장[狗醬], 계삼탕(鷄蔘湯), 약수(藥水), 여름제사, 월복(越伏), 입추(立秋), 청유(淸遊), 팥죽 |
분야 | 생활·풍속/풍속/행사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최진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삼복(三伏)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7년 윤5월 12일, 『세종실록』 2년 5월 16일, 『단종실록』 3년 윤6월 5일, 『연산군일기』 3년 6월 3일, 『광해군일기(중초본)』 10년 윤4월 26일, 『정조실록』 17년 7월 4일, 『세조실록』 3년 4월 18일 |
음력 6월과 7월 사이 연중 가장 더운 기간에 드는 세 번의 복일(伏日).
개설
여름에 더위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인 삼복(三伏)은 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말한다. 초복과 중복이 대개 음력 6월에 드는 반면 말복은 칠월에 든다. 복일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드는데 하지(夏至)를 기준으로 세 번째 경일(庚日)을 초복, 그다음 10일 뒤인 네 번째 경일을 중복, 그리고 입추(立秋)를 기점으로 그 첫째 경일[初庚日]을 말복이라 한다. 삼복은 세 번의 경일에 든다 하여 삼경(三庚)이라 부르기도 한다. 복(伏)이란 금기(金氣)가 엎드려 숨어 있다는 뜻이며, 경(庚)이란 금 기운을 말한다.
초복과 중복은 하지를 기점으로 하지만, 말복은 입추를 기점으로 한다. 초복과 중복이 연이은 경일에 들어 10일 간격인 것과 달리, 말복은 중복일로부터 20일 뒤에 든다. 하지를 기점으로 한다면, 5번째 경일은 건너뛰고 6번째 경일에 말복이 드는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중복과 말복 사이는 월복(越伏)이라 칭하기도 한다.
삼복에는 무더위를 이겨내고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보양식을 먹는 것이 관례였다. 삼복은 24절기 중 소서(小暑)와 처서(處暑) 사이에 들어, 조선시대 왕은 초복부터 처서까지 정사를 돌보는 것[視事]을 정지하는 것이 전례였다. 국가에서는 무더위를 이유로 노역과 경연과 공사(公事)도 잠시 미루었다. 한편 이때에 조정에서는 재해(災害)로 인해 기우제를 지냈으며, 농가에서는 농사의 풍작을 비는 의례를 행했다.
삼복은 설·납일(臘日)과 함께 세시복납(歲時伏臘)이라 불린다. 세시복납에는 부모님의 송수(頌壽)를 기리는 잔치를 벌이고, 사당에는 제를 지냈다. 삼복의 제사는 여름제사로, 납일의 제사는 겨울제사로 불렸다. 의가(醫家)에서는 삼복에 침을 놓지 말라는 경계가 의서(醫書)에 기록될 정도로 그 기간은 근신하였다.
연원 및 변천
삼복은 일 년 중 더위가 가장 심한 때라 하여, 흔히 삼복더위라 한다. 삼복에는 더위를 극복하고 양기(陽氣)를 돕기 위해 개장[狗醬]을 먹었다. 개장은 개를 삶아 파를 넣고 끊인 것을 말하며, 구탕(狗湯)이라 불리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복개’라 불리며, 복날에 보편적으로 이것을 먹었다. 삼복에 개를 계절음식으로 먹게 된 것은 해충 피해인 충재(蟲災)를 막기 위해 복일에 개를 잡아 제사를 지낸 진덕공(秦德公)의 일화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기원전 679년(진 진덕공 2)에 처음으로 복사사(伏祠社)를 만들고 복일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네 문에서 개를 잡아 충재를 막았다고 한다. 한나라 초에는 복날에 천자의 명으로 관리들에게 고기를 하사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개장은 닭이나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고, 개국에 고춧가루를 타고 밥을 말아 먹어 땀을 흘리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것을 보강할 수 있는 계절음식이었다. 또한 복날에 먹어야 보신이 되고 조선시대에도 삼복 중 먹기에 가장 좋은 음식이 개장이라 하였다.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개장 외에 계삼탕(鷄蔘湯)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계삼탕은 닭에 인삼과 대추 그리고 찹쌀을 넣어 고은 것으로,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만들어 먹었다.
또한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초복과 중복 그리고 말복에 팥죽을 먹기도 했다. 팥죽은 팥을 으깨 갈아 만든 국물에 새알심을 넣어 만든 음식이다. 『목은집(牧隱集)』에 나와 있듯이, 팥죽을 먹고 몸 안에 서늘한 기운이 돈다는 것으로 보아, 팥의 차가운 성질이 몸의 열을 내리기 때문에 먹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세시복납은 『예기(禮記)』에 의하면, 중하(仲夏)와 맹추(孟秋)에 각각 천자에게 기장과 햇곡식을 진상하면 천자가 먼저 종묘에 올렸다는 것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내용
삼복 중에는 궁중에서 고위 관리들과 관청에 나무로 만든 빙표(氷票)를 주어 궁의 장빙고(藏氷庫)에 가서 얼음을 타가게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초복부터 입추까지 10일에 한 번씩 신하들에게 얼음을 내려주기를 청하는 기록으로 보아 그러한 전통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삼복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 피해를 입는 한재(旱災)에 시달리므로 국가에서 노역, 경연 등의 일을 금하였다. 1417년(태종 17) 이조 판서 박신(朴信)이 인정전 재건을 청했으나 태종이 삼복 중에 백성을 부릴 수 없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으며(『태종실록』 17년 윤5월 12일), 1420년(세종 2)에는 상왕이 이미 시작된 살곶이천[箭串川]의 돌다리 건설을 정지하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라고 할 정도로 조선시대에 삼복고열(三伏苦熱)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세종실록』 2년 5월 16일).
1455년(단종 3)에 삼복의 무더위로 인해 유학의 경서를 강연하는 경연(經筵)을 정지하라는 명령이 처음 내려졌고(『단종실록』 3년 윤6월 5일), 이후에도 삼복더위로 인해 경연을 중단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또한 1497년(연산군 3)에는 경연뿐 아니라 아침에 왕을 배알하던 조회인 상참(常參)도 폐지한 것이 이미 오랜 일이라 할 정도로(『연산군일기』 3년 6월 3일), 삼복에 공사(公事)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삼복에는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 중 그 죄가 가볍거나 강상(綱常) 죄에 해당되지 않는 이들은 풀어주기도 하였다.
삼복 기간에는 재해로 인해 기우제를 여러 차례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선농단(先農壇)이나 남단(南壇)에 제사를 지낼 때 왕이 제문(祭文)을 직접 작성하되 대신에게 의식을 대신 진행하도록 하였다. 간혹 농사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우제 날이 복일에 가깝게 택일이 되면 제를 미루는 경우도 있었다. 1618년(광해군 10)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택일을 하였으나, 그날이 삼복에 가까워 미룰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10년 윤4월 26일). 이와 같이 조선시대 삼복은 공사뿐 아니라 하늘에 지내는 제사도 미루는 등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가 제사가 삼복을 피하려고 했던 것과 달리, 반가에서는 삼복에 여름제사를 지냈다. 삼복은 설·납일과 함께 사당에 제를 지내던 절기로 여겨졌다. 설은 원일(元日)에 행하는 첫 제사로서, 새해에 사당에 고한다. 삼복은 사당에 고하는 여름제사이며, 납일은 동지 뒤 세 번째 술일(戌日)에 사당에 고하는 겨울제사이다. 이 세 날을 묶어서 세시복납(歲時伏臘)이라 이른다.
의가(醫家)에서는 삼복에 침을 놓는 것도 조심스러워 했다. 1793년(정조 17)에 정조가 열과 냉기가 함께 일어나는 병환을 겪어 침을 맞는 것이 합당한지 여부를 약원(藥院)에 물었는데, 약원에서는 삼복에 침을 놓지 말라는 경계가 의서(醫書)에 기록되어 있다는 답을 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경락을 소통시키는 것에 불과하므로 구애될 것이 없다고 하며 소양과 독맥 그리고 사죽혈에 침을 맞았다(『정조실록』 17년 7월 4일).
1457년(세조 3)에는 삼복 중 말복에 대해 이견이 있었는데, 그 이전에는 서운관(書雲觀)에서 『역요(曆要)』에 의거하여 입추 후 경일이 없으면 입추를 경일로 하여 말복으로 삼기도 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는 중국의 역서(曆書)인 『당력(唐曆)』을 근거로 하여 이를 바로잡아 반포 시행하니 그대로 따랐다 하였다(『세조실록』 3년 4월 18일).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민간에서는 복일에 역병(疫病)을 예방하기 위해 팥죽을 쑤어먹기도 하였다. 팥이 사악한 악귀를 물리치는 음식이라 믿어, 복날 이것을 먹고 악귀를 쫓고 무병하려는 데서 나온 풍습이다. 복일 외에 한 해의 역병을 예방하기 위해 팥죽을 먹는 풍습은 연초인 상원(上元), 즉 정월 대보름날에도 있었다. 또한 더위를 피하기 위해 복일에는 약수터를 찾는 사람도 있었다. 석왕사(釋王寺), 삼방(三防), 강서(江西), 달기 등이 약수로 유명하였다. 서울만 해도 천호동의 약수를 비롯해 남산과 정릉 등에 수많은 약수터가 있다. 복일에는 술과 음식을 마련해 계곡이나 산을 찾아 약수를 마시며 시원하게 노는[淸遊] 풍습도 있었다.
복날에는 농사의 풍작을 비는 의례를 지냈다. 초복에는 곡식이 많이 자라고 많이 뻗어가라는 뜻에서 국수와 좁쌀밥·부침개(밀부침) 등을 장만하여 논이나 밭에 나가서 축원하였다. 국수는 기다란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좁쌀밥은 열매가 많이 맺히는 것을 상징한다. 축원이 끝나면 버드나무에 한지를 매고 떡도 드문드문 가지 사이에 떼어 놓는다. 중복에는 국수로 열매가 잘 맺기를 축원하였다. 가정에 따라 말복에도 유사한 의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도잡지(京都雜誌)』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목은집(牧隱集)』
- 『식산집(息山集)』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삼국·고려시대편』,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전기 문집편』, 2004.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후기 문집편』, 2005.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신문·잡지편(1876~1945)』,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현대신문편(1946~1970)』, 2006.
- 임동권, 『한국 세시풍속 연구』, 집문당, 1984.
- 김명자, 「한국 세시풍속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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