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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4 기준 최신판



도사(道士)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기 위해 여러 신에게 기도하는 도교의 제례의식.

개설

초제(醮祭)는 성신(星辰), 즉 별에 지내는 제사이다. 초제를 지낼 때 재계(齋戒)를 하므로 재초(齋醮)라고도 하였다. 소격전, 소격사, 또는 소격서는 하늘·땅·별에 지내는 도교(道敎)의 초제를 맡아 보는 관아이다. 조선전기 태조 때 실시하고 중종 때 잠시 폐했다가 도로 둔 일이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 폐지되었다.

연원 및 변천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초제가 시작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는 고려 때인 현종 때부터 나라를 위한 도교 의식인 재초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초제가 가장 성행한 것은 예종 때이다. 정사색(淨事色)은 고려시대 하늘·땅·별에 대한 초제를 맡은 관청의 이름이다. 충선왕 때 이것을 재초도감으로 고쳤고, 1391년(고려 공양왕 3)에는 재초도감을 없앴다.

1392년(태조 1) 11월 1일에 예조에서, 고려 왕조에서는 초제의 장소를 많이 두었지만 이를 업신여기고는 전일(專一)하지 않았으므로 소격전 한 곳만 두고 청결함을 힘써서 정성스럽고 공경하는 데 전일해야 한다고 아뢰므로 왕이 그대로 따랐다(『태조실록』 1년 11월 1일).

1394년(태조 3) 5월 9일에는 한재(旱災)로 인해 죄수들을 사유(赦宥)하고 소격전에 왕사(王師)를 불러 태일성(太一星)에 초제하여 비가 오기를 빌었다(『태조실록』 3년 5월 9일). 이와 같이 특별한 사연으로 어느 별 하나에만 지내는 초제를 독초(獨醮)라고 한다.

태조 때는 기본적으로 국가 의례로서 초제를 인정하였으며, 이러한 기조는 성종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1401년(태종 1) 8월 16일에 왕이 예조에 명하여 나라에서 행하는 초제 가운데 폐할 만한 것은 없애고 다만 소재지의 관사(官司)로 하여금 행하게 하되 제문의 규식(規式)과 전물(奠物)의 품수(品數)는 『홍무예제』에 따르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년 8월 16일).

초제를 맡아 보는 소격서를 혁파하라는 건의는 성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484년(성종 15) 1월 16일 왕이 승정원에 전교하여 소격서를 혁파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라고 하였는데, 좌승지권건(權健)과 좌부승지이덕숭(李德崇) 등 신하들이 초제가 오래 전부터 사전(祀典)에 들어 있었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중종 때는 대간 등 신하들이 초제가 좌도(左道)라는 이유로 초제의 장소인 소격서를 혁파해야 한다고 수차례 건의하였는데, 특히 조광조가 이를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쉽게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18년(중종 13) 9월 3일에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안당(安瑭) 등이 아뢰므로 혁파를 전교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사우(祠宇)는 헐지 않고 공해(公廨)로 삼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가 5년 후인 1523년에 자전(慈殿)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초재를 열면서 소격서를 다시 설치하였다. 소격서가 사라진 것은 선조 때로 임진왜란의 여파로 이를 복구하지 못한 채 지나간 것이다.

도교적인 의식은 그 이후 국가 의례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1797년(정조 21) 윤6월 1일에 왕이 대신들과 영성(靈星)과 수성(壽星)에 대한 제사 여부를 논의하면서 이에 대한 존속과 폐지가 소격서 혁파와 함께 논의되지 않은 점을 미루어 두 사항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후속 조치는 없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초제는 국가 차원의 제의였던 만큼 민간에서는 행해질 수 없는 의례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와서 민간에 도교가 보급되면서 이와 유사한 도교 의례가 민속에도 나타났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