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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4 기준 최신판



신년을 하례하며 연말에 선사하는 선물.

개설

세의(歲儀)라 불리기도 한다. 각 지방에서는 세금 대신 지역 특산품을 진상하기 때문에 세공(歲貢)이라 불리기도 한다. 신년 축하와 함께 연말에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선물하는 것으로, 선물과 함께 문안 인사를 드린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개인이 가까운 이들에게 토산물 등을 선물하는 것이나, 나라에서 제석(除夕) 전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도 세궤로 불렸다.

연원 및 변천

중국 진나라의 『풍토기(風土記)』에 의하면 촉(蜀)의 풍속에 연말에 서로 선물하고 문안하는 것을 궤세(饋歲)라 하였다. 이러한 풍속이 유래되어 세궤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각 도의 관찰사, 통제사, 감사, 병사, 수사, 그리고 수령들도 세궤의 예를 따라, 매년 연말에 왕에게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진상하였다. 또한 그 외에 자신의 친척이나 친구에게 지역 특산품을 보내기도 하였다.

세궤로 인한 폐단도 종종 발생하였다. 1760년(영조 36)에 우의정민백상(閔百祥)이 평안병사윤태연(尹泰淵)이 누비(縷緋)로 신[靴]을 만들어서 세궤로 올린 것을 문제 삼아 파면을 청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36년 12월 7일). 세궤가 관직을 도모할 때 일종의 뇌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는 1773년(영조 49)에 외방에서 벼슬길에 오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세궤나 절선(節扇)을 한도 이상으로 선사하여 관직의 고하가 금은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고질적인 병폐가 되었다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영조실록』 49년 4월 9일).

재해를 입은 지역에는 세궤를 정지시켰는데, 1783년(정조 7) 정조는 황해도와 평안도[兩西] 그리고 영남 외에 재해를 입은 지역에서는 세궤를 올리지 말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음력 12월 말일인 제석(除夕)과 정월 대보름날인 상원(上元)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세궤는 그와 관련된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제석 전에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세궤라 하고, 상원 전에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망궤(望饋)라 하였다.

절차 및 내용

지방의 관리들이 진상한 세궤 함에는 편지 외에 지역 토산물 종류를 기록해 놓은 총명지(聰明紙)를 조그맣게 접어 함께 넣었다. 이들은 지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토산품을 선물하였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각 관청의 아전들도 산 꿩[生雉]이나 곶감 등의 물건을 친분이 있는 집에 선물하였다고 하였다.

세궤 중에는 80세 이상 장수하는 노인에게 주는 세궤기로단자(歲饋耆老單子)가 있었다. 일종의 장수를 축하하는 선물이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민간에서도 세궤를 주고받았는데, 어른이나 스승 그리고 처가에도 닭·계란·과일·육포·귤·마른 생선 등을 보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음식을 세궤로 주고받는 경우가 많아, 이것을 세찬풍속(歲饌風俗)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도잡지(京都雜誌)』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목민심서(牧民心書)』
  • 『무명자집(無名子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삼국·고려시대편』,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전기 문집편』, 2004.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후기 문집편』, 2005.
  • 임동권, 『한국 세시풍속 연구』, 집문당,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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