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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4일 (수) 22:0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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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북학 |
한글표제 | 북학 |
한자표제 | 北學 |
상위어 | 실학(實學) |
관련어 | 연행(燕行), 이용후생(利用厚生),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정조(正祖) |
분야 | 문화/인문학/유학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18세기 후반) |
집필자 | 계승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북학(北學) |
청나라가 중화의 문물을 간직하고 있으니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실사구시(實事求是) 차원에서 청의 문물을 배우자는 의미로, 주로 18세기 후반에 유행한 사조.
개설
조선후기 지성사는 병자호란 때 당한 삼전도의 굴욕을 씻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춘추의리(春秋義理)에 기초해 명을 숭상하고 청을 배척한다는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조가 더욱 기승을 부렸으며, 한발 더 나아가 이제 조선이 중화의 적통을 이었다는 조선중화(朝鮮中華) 의식이 만연하였다. 청은 여전히 이적(夷狄)으로 멸시했다. 그러나 명이 망한 지도 100년이 넘어 이주갑(二周甲)에 접어든 18세기 후반에는 중화의 문물이 청나라에 남아있고 청이 중화의 나라로 문명화되었으니 청으로부터 중화의 문물을 배워서 민생을 두텁게 하자는 사조가 등장했다. 이것이 곧 북학(北學)으로, 북국(北國)인 청으로부터 배우자는 움직임이었다. 연행사에 속해 북경을 방문해 그 발전상을 목도하고 돌아온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교유했으나, 조선중화 사조가 여전한 탓에 지식인 사회의 주류를 점하지는 못했다.
내용 및 특징
명을 여전히 조선의 군부(君父)로 여기고 명의 문물을 주(周)·한(漢)·당(唐)·송(宋)의 적통을 잇는 중화로 굳게 믿은 조선의 양반 지식인들은 청이 중원의 새 패자(覇者)로 군림한 후에도 여전히 한족(漢族)의 중화 문물을 흠모하며 청을 오랑캐로 멸시했다. 이는 조선후기를 지배한 존주의리(尊周義理)나 대명의리(對明義理), 그리고 조선중화(朝鮮中華) 등의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청의 국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명이 망한 지도 100년이 지나면서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청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다. 이런 주장은 대개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의 북경을 방문해 조선을 훨씬 능가하는 선진 문물을 직접 목도하고 충격을 받은 일부 지식인이 귀국 후에 제기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에 호응하는 지식인들이 서서히 증가했다.
이들이 오랑캐의 나라로 여기던 청으로부터 배우자는 주장을 펼 수 있었던 명분은 청은 비록 이적의 국가이지만 그들이 보유한 문물은 이전의 명이 간직했던 중화의 문물이므로 조선이 그것을 수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또 청은 학문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조선 사회보다 훨씬 진보한 고도의 선진 문물을 갖추고 있으니, 조선의 국력을 신장하고 민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그 문물을 배워서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도 아울러 제시했다. 특히 이전의 실학 움직임이 대개 토지 분배와 같은 전통적인 개혁에 중점을 둔 데 비해, 북학을 주장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기술 향상을 통한 생산력의 증대와 상공업 장려를 통한 국부의 창출 등과 같이 새로운 프레임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들의 성향을 보면, 정치적으로는 대개 한양과 경기 지역에 거주하던 낙론(洛論)계 노론(老論) 출신이 많았고, 철학적으로 보면 대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지지하고 주기론(主氣論)에 경도된 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존주의리론(尊周義理論)을 여전이 강조하고 서학(西學)을 배척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런 전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청의 문물을 새롭게 중화 문물로 인식하는가 하면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하자는 자세를 취했다.
이런 성향을 보인 인물군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대개 북학파(北學派)라는 이름으로 묶었는데, 학자에 따라 차이가 나며, 후대로 올수록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북학파라는 학파가 당시에 실존했다기보다는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분류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 현재 거론되는 북학파 인물로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서명응(徐命膺)·홍양호(洪良浩)·성해응(成海應)·김정희(金正喜)·정약용(丁若鏞) 등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상기한 북학의 특성을 가장 잘 대표하는 학자는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세 명이다.
이들 세 학자는 모두 존주의리 의식이 너무 지나쳐 경제와 민생을 도외시한 기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라의 부강과 민생에 정치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홍대용은 의리(義理)를 고양하고 문장을 공부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생각할 때 경제(經濟)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은 의리와 윤리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당시의 명분주의 사조를 비판하고 국가에 실제로 필요한 이용후생(利用厚生)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제가도 현실정치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고상한 담론보다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통상의 확대를 통해 국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임을 설파했다. 또한 그 방법으로 세 학자 모두 북학을 강조했다. 이들은 청의 문물을 이적시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청에 대해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이런 주장을 펼 수 있었다.
홍대용은 북경 방문을 통해 청나라 학자뿐만 아니라 청에 거주하는 서양인 학자들과 만나며 다양한 학문을 접했는데, 특히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문학을 수용해 귀국 후에는 지전설(地轉說)을 거론하고 중화를 상대화함으로써 조선인의 세계관과 중화관이 바뀔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의산문답』은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박지원은 『과농소초』를 지어 농업 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열하일기』를 통해 자신의 북학 인식을 잘 드러냈다. 박제가는 국왕 정조에게 바친 『북학의』를 통해 농법 개발을 통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 해외 통상의 장려를 통한 국부의 증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술의 도입 등을 강조함으로써 조선후기 북학 사조의 절정을 이루었다.
변천
18세기 후반에 꽃을 피운 북학 사조는 19세기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들었다. 그 첫째 이유는 정조 사후에 정치 환경이 급변한 탓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18세기 후반 당시에도 조선 지식인 사회의 주류가 여전히 존주의리와 조선중화 의식에 경도되어 있었기에,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의 학자들은 늘 아웃사이더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9세기에 활동한 북학파 인물들은 대개 현실적인 개혁안을 제시하며 청의 문물을 도입하자고 주장하기보다는 고증학(考證學)을 중심으로 철학적 사유를 강조함으로써 현실 문제와 멀어졌다. 북학은 1876년 개항 이후의 개화(開化)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최근에는 비판적인 견해가 나오고 있다.
참고문헌
- 『북학의(北學議)』
- 『열하일기(熱河日記)』
- 『담헌서(湛軒書)』
- 김문용, 『홍대용의 실학과 18세기 북학사상』, 예문서원, 2005.
- 유봉학, 『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 일지사, 1995.
- 계승범, 「조선의 18세기와 탈중화 문제」, 『역사학보』213, 2012.
- 김문식, 「18세기 후반 서울 학인의 청학인식과 청문물 도입론」, 『규장각』17, 1994.
- 박성순, 「조선후기의 대청의식과 북학론의 의미」, 『사학지』31, 1998.
- 허태용, 「‘북학사상’을 연구하는 시각의 전개와 재검토」, 『오늘의 동양사상』14,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