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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4일 (수) 22:0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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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양재역 |
한글표제 | 양재역 |
한자표제 | 良才驛 |
상위어 | 양재도(良才道), 영화도(迎華道) |
동의어 | 영화역(迎華驛) |
관련어 | 도로(道路), 속역(屬驛), 원행(園幸), 현륭원(顯隆園), 화성(華城), 역노비(驛奴婢), 찰방(察訪), 광주부(廣州府), 과천현(果川縣), 시흥군(始興郡)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이승민 |
폐지 시기 | 1896년(건양 1) 1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양재역(良才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6년 2월 5일, 『세종실록』 30년 4월 4일, 『세조실록』 6년 1월 23일, 『세조실록』 7년 2월 23일, 『중종실록』 25년 2월 7일, 『선조실록』 27년 10월 17일, 『선조실록』 37년 12월 5일 |
조선시대 경기도의 도로망인 양재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고려시대에는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을 매개로 한 교통로인 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였다. 이때 양재역(良才驛)은 광주도(廣州道) 과주(果州)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당시 이름은 양재(良梓)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전국의 역로망을 44역도-537속역 체제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좌도충청도 정역찰방(程驛察訪) 소속이 되었다. 그 뒤 세조대에 다시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양재도(良才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정조대에는 양재도가 영화도(迎華道)로 개칭·개편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양재역은 고려시대부터 경기도 과주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광주도에 속한 15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광주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양재역(良才驛)으로 개칭되어 좌도충청도정역찰방에 소속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 편에 따르면, 양재역에는 역마 27필과 역노비 27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60년(세조 6)에 경기도와 하삼도(下三道)의 역을 정비하였다. 1457년(세조 3)에 여러 도와 역에 역승(驛丞)을 없애고 찰방이 여러 도를 아울러 관리하게 했는데, 역로가 멀어 제대로 순시하지 못하게 되면서 각종 폐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양재역이 소속되어 있던 양재도를 비롯해 중림도(重林道)·동화도(同化道)에 속한 23개 역을 통합하여 경기좌도(京畿左道)라 부르고, 경기좌도찰방이 맡게 하였다(『세조실록』 6년 2월 5일). 그 뒤 1462년(세조 8)에 세종대의 44역도-537속역 체제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양재역은 종6품 찰방이 근무하는 양재도의 중심 역이 되어 다시 양재도에 소속되었고, 이 체제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계승됨으로써 양재도의 속역으로 확립되었다. 정조대에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의 옛 읍치인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정조가 현륭원에 원행(園行)을 하던 와중인 1796년(정조 20)에 양재역을 영화역으로 고치고 화성 북문(北門)으로 이설하였다.
양재역은 하삼도로 향하는 경기도의 주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양재역에서 충주단월역(丹月驛)까지는 하삼도의 요로(要路)였으므로 사객(使客)의 왕래가 잦았다. 그 때문에 역무(驛務)가 매우 힘들어 역리들이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세종대에는 양재역에서 안부역(安富驛)까지 다시 찰방을 두어 역을 정상화하게 하였다(『세종실록』 30년 4월 4일). 또 세조대에는 이 지역 역민들의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 선공감(繕工監)에서 잡물을 수송할 수레를 만들어 역마다 4대씩 배치하였으며, 역마가 기운을 차릴 때까지 부호(富戶) 20호씩을 뽑아 번갈아 역역(驛役)을 돕도록 하였다(『세조실록』 6년 1월 23일). 그뿐 아니라 하삼도의 백성 269명을 양재역으로 이주시켜 역호(驛戶)을 조성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7년 2월 23일). 이처럼 역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530년(중종 25)에는 양재역과 낙생역(樂生驛)의 경우 식량과 여물이 떨어져 역마를 사육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중종실록』 25년 2월 7일).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4년(선조 27)에는 양재역 근처에 목책을 설치하고, 흩어진 마을 주민과 역졸들을 소집하여 역로를 회복하도록 조치하였다(『선조실록』 27년 10월 17일). 1604년(선조 37)에는 양재도찰방 박여량(朴汝樑)이 양재역의 업무를 개선하기 위한 8개 조항의 계목을 올리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7년 12월 5일).
양재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과천현 동쪽 15리, 광주부 서쪽 30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과천현 동쪽 15리,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광주부 서쪽 40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 따르면, 과천현 동쪽 15리 지점인 시흥군 신동면 양재리에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양재역 사거리 일대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