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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1:2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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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양덕당 |
한글표제 | 양덕당 |
한자표제 | 養德堂 |
상위어 | 경희궁(慶熙宮) |
관련어 | 경현당(景賢堂), 덕화전(德和殿), 승휘전(承暉殿), 안희헌(安喜軒), 함춘헌(咸春軒)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홍석주 |
장소 | 경희궁 |
관련 인물 | 숙종, 정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양덕당(養德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효종실록』 6년 12월 11일, 『숙종실록』 24년 11월 22일 |
경희궁에서 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던 전각.
개설
양덕당은 경희궁의 남동쪽 영역에 위치하여 경현당(景賢堂)과 연계하여 사용되었다. 경현당은 세자가 경서를 강독하고 하례를 받았던 곳이다.
위치 및 용도
양덕당은 경현당의 북쪽에 있고 남쪽에는 숭덕문(崇德門)을 두었다. 경희궁에서 승휘전(承暉殿)이 세자의 정침이었을 때 양덕당은 동궁의 내당(內堂)으로 사용되었다. 승휘전은 효종 때 철거하여 창덕궁 만수전(萬壽殿)을 짓는 데 사용하였고(『효종실록』 6년 12월 11일), 숙종 때 중건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하지 않았다(『숙종실록』 24년 11월 22일). 승휘전이 없어진 후 양덕당은 경현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 부속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내전(內殿)의 일반적인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 보면, 양덕당은 1698년(숙종 24) 승휘전이 불타기 전에 쓰던 동궁의 내당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양덕당의 용도는 다양하다. 대표적인 예가 경현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 준비 공간으로 사용한 것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이곳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이미 승휘전이 소실되어 세자의 생활 공간이 옮겨진 후이다.
1818년(순조 18)에 덕화전(德和殿)으로 이름을 고쳤다. 하지만 이후의 기록에서도 양덕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훼철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형태
「서궐도안(西闕圖案)」에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양덕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함춘헌(咸春軒), 서쪽에는 안희헌(安喜軒)이 배치되어 있다. 널찍한 안마당을 갖춘 팔작집으로 묘사되어서 위계가 높은 건물 중 하나로 보인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64년(영조 40)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가 양덕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인 사도세자가 사망한 지 2년 뒤의 일이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
-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편, 『궁궐지Ⅱ: 창경궁·경희궁·도성지』,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6.
-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
- 홍석주, 「조선조 광해군대의 궁궐건축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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