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옥재(集玉齋)"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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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1:22 기준 최신판



고종대 경복궁 신무문 안쪽에 어진 봉안과 장서 보관을 위해 지은 청나라 건축 형식의 전각.

개설

집옥재는 창덕궁의 함녕전(咸寧殿) 일곽의 별당으로 지었던 건물을 1891년(고종 28)에서 1893년(고종 30) 사이에 경복궁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고종실록』 28년 7월 13일). 함녕전은 원래 수정전(壽靜殿)이었으나, 1881년(고종 18)에 이름을 바꾸었다(『고종실록』 18년 7월 22일). 집옥재를 이건하기 이전에 경복궁에서는 내전 일곽의 재건이 이루어졌는데, 건청궁(乾淸宮)에 양관인 관문각(觀文閣)을 세운 직후였다. 이러한 일련의 공사 마지막으로 건청궁의 서쪽에 집옥재를 옮겨 짓도록 했다(『고종실록』 28년 7월 13일).

집옥재 일곽은 고종후기에 건청궁을 중심으로 함화당(咸和堂), 집경당(集慶堂) 일곽과 함께 궐내의 북쪽 영역에 새로 조성된 공간이다. 집옥재는 협길당(協吉堂), 팔우정(八隅亭)과 함께 나란히 배치되었고 각각 복도로 연결되었는데, 왕실 장서의 보관, 어진 봉안, 왕의 집무 공간을 하나의 영역으로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위치 및 용도

집옥재가 들어선 곳은 신무문(神武門) 안쪽의 건청궁 서쪽으로 원래는 비어 있었던 곳이다. 주변에는 병정처소와 수문장청이 있었고 남쪽에는 보현당(寶賢堂)과 가회정(嘉會亭)이 있었다. 집옥재는 고종의 어진과 고종이 청나라에서 사들인 서양 관련 서적, 왕실의 장서를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외형상 양 측벽과 후면 벽을 벽돌로 쌓고 지붕마루에는 치문을 설치하는 등 청나라풍의 형태를 띤 것이 특징이다.

집옥재 완공 이후부터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기까지 이곳에서 약 3년간 지내면서 단 4회 외국 공사를 만난 것(『고종실록』 30년 8월 1일)(『고종실록』 30년 8월 26일)(『고종실록』 30년 8월 27일)(『고종실록』 31년 3월 25일) 이외에는 신하와의 일상적인 소대나 강학은 하지 않았으므로 어진 봉안이 집옥재의 주 용도였다고 할 수 있다. 외국 공사를 접견할 때 어진은 협길당에 옮겨 두었다. 협길당은 상황에 따라 어진을 잠시 보관하기도 했으나 온돌방을 갖추고 있어 집무처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팔우정은 장서를 보관하는 서고였다.

변천 및 현황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후 집옥재에 있던 어진을 경운궁 별당으로 옮겼고(『고종실록』 33년 8월 31일) 장서 또한 경운궁 수옥헌(漱玉軒)으로 옮겼다.

집옥재에 있었던 왕실 장서의 면면을 알 수 있는 책으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집옥재서목(集玉齋書目)』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집옥재목록외서책』이 있다. 고종은 기존에 규장각에서 소장하던 책의 목록을 작성하고, 1880년(고종 17)대에 청나라에서 서양 관련 서적을 다량 구입하였다. 이렇게 수집된 책들은 집옥재에 소장하면서 일괄 정리되었다. 집옥재 도서는 한일병합조약 이후 황실 도서로 바뀌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집옥재서적조사기』로 다시 정리되었다. 1915년 집옥재 도서의 대부분은 총독부(總督府) 도서로 전환되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 소속되었다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보관하고 있다. 황실 도서를 정리할 때 이왕직으로 넘어간 것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다.

형태

집옥재 일곽은 동쪽으로는 어구, 서쪽으로는 신무문으로 가는 통로 사이에 있다. 유형문(維亨門)에서 신무문으로 가는 통로 중간쯤 동쪽 담장에 3칸의 광림문(廣臨門)이 있고 광림문을 들어서면 북쪽에 담장이 있으며 일영문(日永門)과 일접문(日接門)이 있다. 두 문의 안쪽은 보현당과 집옥재이다. 보현당의 동행각이 끝나는 곳에 3칸짜리 건선문(建善門)이 있는데 이 문은 왕이 내전에서 건청궁으로 갈 때 이용했으며, 집옥재 일곽에서 건청궁으로 통하는 문이기도 하다. 보현당 북행각의 만유문(萬孚門)은 집옥재로 통하는 문이다. 일접문 안에는 정면 6칸, 측면 2칸 반의 보현당이 있다. 보현당 서쪽으로 월문이 2개 있는 담장을 두고 가회정이 있다. 가회정 북쪽의 월문이 금로문(金露門)이다.

가회정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에 내부는 모두 마루로 되어 있고 뒤편에 복도가 있어서 신무문까지 연결된다. 가회정 북쪽 담장 안에 있는 종각은 시계탑이다. 보현당에서 시계탑으로 들어가는 문은 보성문(寶成門)이다. 보현당과 가회정 일곽을 지나 북쪽에는 집옥재와 팔우정, 협길당이 있으며 집옥재 북쪽은 내궁장 없이 바로 경복궁의 북쪽 궁장이다.

집옥재는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후면 공포와 전체 가구 방식은 이익공 형식이고 전면은 내외 1출목씩의 다포 형식인데 『궁궐지(宮闕志)』와 「북궐도형(北闕圖形)」에는 ‘주삼포’라고 적혀 있다. 후퇴와 양 협간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협간은 원래 방이었고 불 때는 시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체가 장마루로 변형되어 있다. 대청은 3칸이며 내부 머름과 창호 상부의 벽에는 화려하게 투각한 청판과 낙양으로 장식하였고 대청의 천장에는 각 칸마다 팔각형의 보개를 만들어 어칸에는 용, 협칸에는 봉황을 그려 넣었다. 전면에는 월대를 두었으며 궁궐의 정전 월대에만 설치되는 답도와 해태를 조각한 소맷돌을 설치했다. 측면 벽은 붉은색 벽돌을 지붕까지 쌓았고 후면에는 원형의 월문을 내어 외형에서 청나라식 건물을 연상하게 하지만 실제 목구조의 구성은 전통적인 방식에 전면의 공포만을 변형한 것이다.

집옥재 일곽의 가장 동쪽에 있는 협길당은 지붕마루에 양상도회를 하고 취두와 잡상까지 촘촘히 갖추고 있어서 최상급의 지붕 장식을 갖추었다. 집옥재, 팔우정과는 다르게 대청과 온돌방을 갖추었다. 중앙에 대청이 2칸이고 모두 온돌방이며 온돌방 주변에는 가퇴가 설치되어 있어서 거처할 곳으로 적당한 평면 구성이다. 대청은 전·후 툇간을 두었고 2고주 5량에 물익공이다.

팔우정은 집옥재의 서쪽에 2층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팔각형의 평면이고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층과 위층은 각각 마루이다. 서까래는 각서까래를 사용했고 처마와 2층 난간에 낙양을 둘러 장식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궁궐지(宮闕誌)』「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집옥재보수공사보고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2.
  • 문화재청, 『집옥재: 수리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05.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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