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당(寶賢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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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 각국 사신들을 접견하고 어진을 봉안하였던 경복궁 내 건물.

개설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 경복궁에 화재가 잇달아 일어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겨 지냈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이 일어나자 1885년(고종 22)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보현당은 고종이 경복궁으로 돌아온 뒤 미국, 독일, 일본 등 각국 공사를 만날 때 접견실로 이용하였다. 또한 보현당은 어진(御眞)이 보관되어 있어, 춘하추동의 맹삭(孟朔)에 해당하는 1월·4월·7월·10월에 전현직 신하들이 왕명을 받들어 보현당에서 정기적인 점검과 전배를 아뢰었다.

위치 및 용도

보현당은 건청궁의 서쪽, 고종이 환궁 후 서재로 사용했던 집옥재(集玉齋)의 앞에 있었다고 한다. 미국, 독일, 프랑스 공사 등을 접견하는 접견실이었으며(『고종실록』 27년 4월 8일), 이곳에서 각국 공사들은 국서를 바쳤고, 고종은 그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1891년(고종 28) 6월에는 보현당에 봉안되어 있던 어진을 가회당(嘉會亭)으로 옮겨서 봉안하라는 명이 있었고, 7월에는 보현당을 고쳐 짓고 집옥재를 옮기라는 명을 내렸다(『고종실록』28년 6월 13일)(『고종실록』28년 7월 13일)]. 현재 보현당 건물은 소실되고 전하지 않는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98년(광무 2)에 보현당 창고지기로 서양 요리로 담당하다가 궁에서 쫓겨났던 김종화(金鍾和)라는 자가 고종이 먹는 커피에 아편을 탄 사건이 있었다. 이때는 고종이 경운궁에 거처할 때이므로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보현당은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경운궁에서 보현당의 위치는 영복당(永福堂) 뒤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귀인정씨(貴人鄭氏)가 이곳에서 왕자 이우(李堣)를 낳아서 보현당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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