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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 초 여러 번 판사재(判司宰)·호조 전서(典書)·판통례(判通禮)·병조 [[참의(參議)]]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398년(태조 7) 강주진 첨절제사(江州鎭僉節制使)로 강화부사(江華府使)를 겸했다. 1404년(태종 4) [[상호군(上護軍)]]으로 있다가, 왕의 명에 따라 동북면 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여진족을 안무(按撫)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경원등처병마사(慶源等處兵馬使)에 임명되었다. 1406년(태종 6) 2월에 만주 목단강(牧丹江)의 고주(古州:具州) 지역에 살던 혐진(嫌眞) 우디캐[兀狄哈]의 추장 키무나[金文乃] 등이 경원(慶源)의 소다로(蘇多老)를 침략하였는데, 박령이 그들을 격퇴하였다. | 조선 개국 초 여러 번 판사재(判司宰)·호조 전서(典書)·판통례(判通禮)·병조 [[참의(參議)]]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398년(태조 7) 강주진 첨절제사(江州鎭僉節制使)로 강화부사(江華府使)를 겸했다. 1404년(태종 4) [[상호군(上護軍)]]으로 있다가, 왕의 명에 따라 동북면 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여진족을 안무(按撫)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경원등처병마사(慶源等處兵馬使)에 임명되었다. 1406년(태종 6) 2월에 만주 목단강(牧丹江)의 고주(古州:具州) 지역에 살던 혐진(嫌眞) 우디캐[兀狄哈]의 추장 키무나[金文乃] 등이 경원(慶源)의 소다로(蘇多老)를 침략하였는데, 박령이 그들을 격퇴하였다. | ||
− | 1408년(태종 8)에는 길주도 찰리사(吉州道察理使) 겸 길주판목사(吉州判牧事)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황해도도절제사(黃海道都節制使)로 해주판목사(判海州牧使)를 겸하였다. 그 때 상왕 태종과 함께 세종이 해주(海州) 등 여러 곳을 순행하자 관찰사이숙무( | + | 1408년(태종 8)에는 길주도 찰리사(吉州道察理使) 겸 길주판목사(吉州判牧事)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황해도도절제사(黃海道都節制使)로 해주판목사(判海州牧使)를 겸하였다. 그 때 상왕 태종과 함께 세종이 해주(海州) 등 여러 곳을 순행하자 관찰사이숙무(李叔畝)와 같이 맞이하였는데, 세종은 비록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의 차서(次序)가 있으나 그가 구신(舊臣)임을 들어 감사보다 상좌에 앉히고 [[어의(御衣)]]를 하사하는 한편 환궁한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시켰다. 1421년(세종 3)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에 오르고, 그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가 1434년(세종 16) 12월 24일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하루 동안 정조시(停朝市)하고 조부(弔賻)하였으며, 중궁(中宮)도 또한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
=='''성품'''== | =='''성품'''== |
2018년 1월 9일 (화) 22:4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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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령 |
한글표제 | 박령 |
한자표제 | 朴齡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초기 |
왕대 | 태조~세종 |
집필자 | 박은화 |
자 | 호부(浩夫) |
시호 | 양정(襄靖)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사망 | 1434년(세종 16) 12월 24일 |
본관 | 의창(義昌) |
주거지 | 서울 |
자녀 | (1자)박홍간(朴弘幹) (2자)박홍신(朴弘信) (3자)박홍지(朴弘智)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령(朴齡) |
총론
[미상~1434년(세종 16)]. 태조~세종 때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이다. 자는 호부(浩夫)이고, 본관은 의창(義昌)이다. 아들은 박홍간(朴弘幹), 박홍신(朴弘信), 박홍지(朴弘智)이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고려 말, 조선 세종 시대 활동
조선 개국 초 여러 번 판사재(判司宰)·호조 전서(典書)·판통례(判通禮)·병조 참의(參議)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398년(태조 7) 강주진 첨절제사(江州鎭僉節制使)로 강화부사(江華府使)를 겸했다. 1404년(태종 4) 상호군(上護軍)으로 있다가, 왕의 명에 따라 동북면 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여진족을 안무(按撫)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경원등처병마사(慶源等處兵馬使)에 임명되었다. 1406년(태종 6) 2월에 만주 목단강(牧丹江)의 고주(古州:具州) 지역에 살던 혐진(嫌眞) 우디캐[兀狄哈]의 추장 키무나[金文乃] 등이 경원(慶源)의 소다로(蘇多老)를 침략하였는데, 박령이 그들을 격퇴하였다.
1408년(태종 8)에는 길주도 찰리사(吉州道察理使) 겸 길주판목사(吉州判牧事)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황해도도절제사(黃海道都節制使)로 해주판목사(判海州牧使)를 겸하였다. 그 때 상왕 태종과 함께 세종이 해주(海州) 등 여러 곳을 순행하자 관찰사이숙무(李叔畝)와 같이 맞이하였는데, 세종은 비록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의 차서(次序)가 있으나 그가 구신(舊臣)임을 들어 감사보다 상좌에 앉히고 어의(御衣)를 하사하는 한편 환궁한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시켰다. 1421년(세종 3)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에 오르고, 그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가 1434년(세종 16) 12월 24일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하루 동안 정조시(停朝市)하고 조부(弔賻)하였으며, 중궁(中宮)도 또한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성품
박령은 성품이 너그럽고,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무예(武藝)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