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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어가를 앞에서 시위(侍衛)하거나, 잘못을 범한 군인을 체포하고 곤장을 때리는 임무 등을 담당한 군사.

개설

뇌자는 군뇌(軍牢) 또는 뇌자수(牢子手)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창설된 훈련도감에 설치된 후 조선후기 각 군영에 두루 배치되었다. 뇌자는 관중을 압도하였으며 순령수(巡令手)와 함께 어가를 앞에서 시위하거나, 잘못을 범한 군인을 체포하고 곤장을 때리는 임무 등을 담당하였다. 정부는 어가를 수행한 뇌자에게 죽 등의 음식을 주고 포(布)·무명[木] 등을 상으로 주어 노고를 위로하였다. 서총대(瑞蔥臺)에서 시행하는 무과 시험[試取] 등을 통해 등용의 기회도 제공되었다. 뇌자는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각 군영의 설치·폐지에 따라 소속처 등이 변화하였는데, 맨 마지막으로 호위국(扈衛局)에 소속되었다가 1907년(순종 즉위) 군대 해산 때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뇌자는 『만기요람』에서 확인되는 ‘호위청에 10명, 용호영에 22명, 훈련도감에 118명(복마군 8명), 금위영에 76명(복마군 5명), 어영청에 90명(복마군 6명)’ 등 중앙군과, 충청수영에 18명 등 지방군에도 설치되었다. 장용영 뇌자 118명[순조실록』2년 2월 7일 4번째기사]은 서자지(書字的)와 패두(牌頭) 각각 1명과 ‘입번(入番) 46명, 대장소 43명, 도제조소 10명, 향색제조소(餉色提調所) 7명, 종사관소(從事官所) 5명, 복마군(卜馬軍) 5명’으로 구성되었고, 호위청 뇌자는 매달 급료로 쌀 아홉 말과 봄·가을의 피복비로 무명 네 필을 받았다.

뇌자는 어가를 호위하고, 잘못을 저지른 군인을 체포하여 곤장 때리는 일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1752년(영조 28) 뇌자 5쌍은 왕이 능(陵)으로 거둥하였을 때 순령수 5쌍과 함께 어가의 앞을 시위하였고, 1637년(인조 15) 훈련도감 뇌자는 순령수와 함께 세자를 배왕(陪往)하거나 홍제원에서 취수(吹手)와 함께 칙사(勅使)를 맞이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아울러 1627년 정묘호란 때 훈련도감 뇌자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당하(堂下) 3품 이하의 관리도 곤장 때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정조대·고종대 뇌자는 군사 훈련 때 문을 열라고 세 번 소리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변천

1730년(영조 6) 왕이 도성 안이나 당일로 돌아올 수 있는 왕릉에 거둥할 때는 뇌자와 순령수가 각각 5쌍, 그리고 왕이 먼 왕릉에 행차하여 대궐 밖에서 하룻밤을 묵을 경우에는 각각 10쌍을 설치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러다가 1886년(고종 23) 어가의 모든 거둥에 용호영 5쌍, 친군별영 15쌍 등 20쌍을 배치하도록 하였다.

뇌자는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각 군영의 설치·폐지에 따라 소속처는 물론이고, 장용영 뇌자가 1782년 15명에서 1793년 118명으로 증가한 것처럼 정원 등에도 변화가 있었다. 특히 1900년 헌병대가 창설됨으로써 뇌자의 임무는 어가의 호위에 중점이 두어졌고,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으로 조선후기에 창설되었던 군영들이 모두 폐지된 후 협련군(挾輦軍)·협여군(挾轝軍) 등의 임무는 ‘공병대→호위군→호위대→호위국’으로 이속되면서 뇌자의 최종 소속처도 호위국이 되었다. 그것은 1907년 5월 18일 『대한매일신보』의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 기부자에 호위국 소속 뇌자 63명의 성명이 기재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뇌자는 1907년 군대 해산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 제도』, 혜안, 2000.
  •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 신명호, 「조선 후기 국왕 행행 시 국정 운영 체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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