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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일 (수) 01:00 기준 최신판



기근이 발생한 지역에서 세금을 중앙으로 보내지 않고 지역의 진휼미로 사용하는 것.

개설

조선에서는 기근이 발생하면 백성의 생존을 보장하고, 다음 해 농사를 대비하도록 돕는 환곡제도(還穀制度)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전세(田稅)가 4두(斗)로 하향 고정화되어 가고, 재정 지출이 증가하면서 국가의 비축곡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환곡으로 분급할 수 있는 곡물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였다. 여기에 17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이례적인 대규모 기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기근에 대비하는 조치로 전세와 대동미(大同米)를 중앙에 상납하지 않고 해당 지역에 남겨 진휼미(賑恤米)로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유진(留賑)이라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유진의 시행 배경에는 전세 수취액의 하향 고정화로 인한 국가 비축곡의 감소, 17세기의 이례적인 잦은 기근, 그리고 곡물 수송에 따른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 등이 있었다. 대동법 시행으로 국가의 비축곡 확보가 어느 정도 수월해진 이후에도 유진은 수송비 절감이란 이점이 있었지만, 중앙 재정의 감축이란 문제점이 있어서 상시적으로 활용된 제도는 아니었다. 유진은 주로 17세기에 집중적으로 시행되었고(『현종실록』 12년 1월 8일), 이후 18세기에도 몇 차례 시행되었다(『영조실록』 8년 11월 20일).

내용

조선은 국초부터 기근에 대비하여 환곡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환곡으로 분급하는 곡식은 전세로 거둔 곡물 중 중앙으로 보내지 않고 각 지방에 저장해 놓은 주창(州倉)의 곡식을 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16세기부터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의 판정이 모두 하하년(下下年)으로 관례화되면서 수취액도 4두로 하향 고정화되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전세가 중앙으로 수송되었고, 지방 주창의 비축곡은 점차 감소하였다. 17세기부터 공납제의 개혁안인 대동법이 충청도부터 시행되었는데, 이후로 국가의 비축곡의 부족은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대동법이 아직 전국적으로 시행되지 않은 현종대 이례적인 대규모의 기근이 자주 발생하였다. 예컨대 1670~1671년(현종 11~12)의 경신대기근(庚申大饑饉)은 사망자가 약 1,000,000명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 기민을 진휼하는 것이 국가의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대동법이 효과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으나 아직 국가의 비축곡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고, 또 기근 지역으로 곡물을 옮기는 것도 상당한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기근 지역의 전세와 대동미를 해당 지역에 유치하여 진휼미로 전용(轉用)하는 방법이 1662년(현종 3)에 처음 시행되었다(『현종개수실록』 3년 1월 25일).

유진은 수송 비용을 절약하고 해당 지역에서 신속한 진휼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나, 국가의 재정 운영에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진을 행하더라도 수취액의 전액이 아닌 일부분만을 남겨 진휼을 행하게 하기도 하였다. 『현종실록』과 『숙종실록』에 의하면 현종·숙종대에만 각각 7차례 유진을 행하였다.

변천

18세기에는 이전 시기에 비하여 기근의 빈도가 줄어들었다. 또한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과 환곡 운영의 확대 등으로 인하여 각 지역에서 상당한 곡식을 비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진은 17세기만큼 자주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진은 신속한 진휼, 수송비 절감이란 장점으로 인하여 18세기 중반까지 기근 발생 시에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