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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일 (수) 00:5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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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나각 |
한글표제 | 나각 |
한자표제 | 螺角 |
관련어 | 대취타(大吹打), 선유락(船遊樂),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항장무(項莊舞) |
분야 | 문화/예술/음악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현재 |
왕대 | 고려~현재 |
집필자 | 이정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나각(螺角)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43년 3월 3일 |
관악기의 하나.
개설
나각(螺角)은 군영에서 훈련과 행군을 할 때, 불교에서 재를 올릴 때 사용되었다. 또한 조선통신사의 행렬과 연회, 궁중의 제례·연회·행차 등에서도 쓰였다. 나(螺)라고도 한다. 한 음만 낼 수 있으며 낮고 웅장한 지속음을 구사한다.
연원 및 변천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기록이 문헌에 나타나며, 조선시대와 대한제국기에 널리 활용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의 위장(衛杖)에서 사용되었고 절에서도 활용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종묘제례에서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춤출 때 주위에 늘어놓는 의물로 활용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정대업지무 연행에 의물을 진설하지 않게 되면서 나각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통신사에 수반되거나, 궁중연향에서 선유락(船遊樂)과 항장무(項莊舞) 반주악기로 편성되었다. 또한 군영에서는 신호용 악기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왕이 온양으로 행차하는 중 과천 행궁(行宮)에서 머물렀다가 떠날 때 선전관으로 하여금 나각을 불게 했던 기록이 있다(『숙종실록』 43년 3월 3일).
현재에는 대취타(大吹打)를 연주할 때 나각이 사용된다.
형태
나각은 바다에 사는 큰 소라를 채취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크기가 규격화되지 않았다. 큰 소라의 속살을 꺼내고 취구(吹口)를 만들었으며, 소라 겉껍데기에 붉은 칠을 하거나 소라 끝부분에 홍색 술[垂兒]을 매달기도 했다.
- 00016715_그림1_『악학궤범』의 나각
- 00016715_그림2_『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屛)』의 나각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악학궤범(樂學軌範)』
- 『종묘의궤(宗廟儀軌)』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만기요람(萬機要覽)』
- 『헌종무신진찬의궤(憲宗戊申進饌儀軌)』
- 『고종임인진연의궤(高宗壬寅進宴儀軌)』
- 강우방·김승희, 『甘露幀』, 도서출판 예경, 1995.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궁중행사도 Ⅰ』, 그라픽네트, 2010.
- 서인화 외, 『조선시대 진연 진찬 진하병풍』, 국립국악원, 2000.
- 이숙희, 『조선후기 군영악대』, 태학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