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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일 (월) 21:09 기준 최신판



숙고하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아는 작용을 뜻하는 말.

개설

양지(良知)는 숙고하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아는 작용이다. 이 말은 맹자가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양능이고 생각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양지이다. 두세 살 난 아이도 자기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없으며, 커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자가 없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지, 양능의 양(良)은 본래부터 그러한 선험적인 것으로서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두세 살 된 어린아이가 가르치지 않아도 부모를 사랑할 줄 알고 아우가 형을 공경할 줄 아는 것이 양지, 양능인 것이다. 이에 남송의 육구연(陸九淵)은 "만물이 모두 나에게 완비되어 있으니 반성하고 정성을 다하면 이보다 즐거운 것은 없다."고 말했고, 명대의 왕양명(王陽明)은 양지와 양능의 도덕적 자발성에 근거하여 양명학을 완성했다. 왕양명은 사람이 양지를 전면적으로 발휘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도덕을 바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치양지(致良知)라고 하는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며, 양지에 근거하는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되지 않는다. 마음은 선악을 넘어 있지만, 뜻에서 선악이 발생하므로 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양지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양지를 기르는 방법론으로 욕심을 근본에서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는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과 구체적인 사물이나 상황 위에서 마음을 단련한다는 사상마련(事上磨鍊)의 길을 제시하였다. 이후 왕양명의 치양지설은 누구나 양지를 갖고 태어나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과 양지를 가리고 있는 선악을 제거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나뉘게 된다.

조선조에서 양명학을 공격한 것은 주로 전자의 입장에 대한 것이다. 조선조에서도 양지가 본래부터 시비를 분별할 수 있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는 사물에 대하여 깊이 있는 탐구를 하는 격물이 필요가 없다고 점 때문에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내용 및 특징

양지라는 말은 본래부터 시비를 분별할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미 세종대에 여진족이 짐승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양지가 있으니, 교화를 베풀면 귀순할 수 있다고 하여(『세종실록』 9년 9월 29일), 양지 개념이 조선초기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중종대에 성균관 대사성유숭조가 양지·양능은 자연의 천성이니, 어린애가 장성하기까지 애경(愛敬)을 가르치지 않아도 느낌에 따라 응하고 저절로 발동하는 것이라고(『중종실록』 6년 3월 12일) 하였고, 홍문관 부제학유진동(柳辰仝)은 오륜은 천성의 고유한 바인 양지로 인하여 새롭게 정하였다고 하였다(『중종실록』 38년 5월 4일).

학문으로서 양명학은 왕양명 생존시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박상(朴祥)이나 김세필(金世弼) 등이 왕양명이 치양지설을 제창하였을 때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양명학에 대해서 이황이 불교적이라고 배척한 이후, 유희춘, 유성룡, 박세채, 한원진 등이 배척하였다. 그러나 남언경, 장유, 최명길 등은 양명학을 수용하였으며, 정재두에 의해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이광사, 이충익, 이건창, 박은식, 정인보 등이 양명학을 발전시켰다.

양지의 개념은 선비들뿐만 아니라 왕도 자주 사용하였다. 선조는 시비(是非)를 구별하는 마음은 사람의 양지인데 잘 모른다고 하였던 좌상김귀영이나 이이와 박순을 논핵하였던 삼사가 시비가 분명하지 못하다고 하였고(『선조실록』 16년 7월 16일) (『선조실록』 16년 8월 18일), 성균관 유생 이정우에게는 학문에 힘쓰고 자신을 살펴 양지를 확충해 나가면 시비가 자연히 가슴속에 훤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선조실록』 16년 8월 10일).

그러나 양명학에서 말하는 치양지의 양지에 대해서는 이황이 양명학을 비판한 이후, 그의 문인 유성룡은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선조가 경연에서 양지에 대해 묻자 유성룡은 양지만을 믿고 글을 읽지 않으면 매사를 두루 알 수 없다고 하며(『선조실록』 27년 7월 17일), 양지만 강조하면 격물 공부에 대해 소홀히 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후 숙종대에 권상유는 왕수인이 육상산의 뒤를 이어 양지·양능이 널리 퍼져갔다고 비판하였고(『경종수정실록』 4년 4월 24일), 영조 때에는 사헌부에서 육구연(陸九淵)의 돈오설(頓悟說)과 왕양명의 양지론(良知論)은 성리학과 배치되는 것인데, 좨주(祭酒)정제두(鄭齊斗)가 정주학을 배반하고 육상산과 왕양명의 학설을 답습하였다고 비판하였다(『정조실록』 2년 7월 19일).

참고문헌

  • 한국사상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 陳來 著, 전병욱 옮김, 『양명철학』, 예문서원, 2003.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편, 『유교대사전(儒敎大辭典)』, 박영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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