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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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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초 |
한글표제 | 박초 |
한자표제 | 朴礎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고려~조선 |
왕대 | 고려 공민왕~조선 세종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자허(子虛) |
호 | 토헌(土軒)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367년(고려 공민왕 16) |
사망 | 1454년(조선 단종 2) |
본관 | 함양(咸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초(朴礎) |
총론
[1367년(고려 공민왕 16)~1454년(조선단종 2) = 88세]. 고려 말 공민왕~조선세종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전라도병마도절제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이다. 자는 자허(子虛)이고, 호는 토헌(土軒)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고려 공양왕 시대 활동
1391년(공양왕 3) 성균관(成均館)생원(生員)으로서 불교 배척에 대한 상소를 하여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의 변호로 마침내 사면되었다.
조선 태종 시대 활동
1404년(태종 4) 사간원(司諫院) 좌헌납(左獻納)으로 재직할 때, 그가 선공감(繕工監) 승(丞) 으로 있던 시절에 관용(官用)의 철을 개인적으로 썼다는 사실 때문에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장형에 처해졌다.[『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 4년 6월 24일, 태종 4년 12월 4일] 1413년(태종 13)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로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 온 후, 전라도수군도만호(全羅道水軍都萬戶) 겸 지해진군사(知海珍郡事)가 되었다.[『태종실록』태종 13년 6월 16일, 태종 13년 11월 24일, 태종 13년 12월 15일] 1417년(태종 17)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에서 그가 관물(官物)을 훔친 죄를 받아 이름이 이미 죄적(罪籍)에 올라 있고, 또한 제주는 해외(海外)의 이국(異國)이나 마찬가지인 곳으로서 감사(監司)의 출척(黜陟)이나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그가 반드시 꺼리는 바 없이 탐욕을 자행하게 되면 백성들이 그 폐단을 입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므로 파직당하였다.[『태종실록』태종 17년 2월 27일] 그 해에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되었다.[『태종실록』태종 17년 윤5월 18일] 1418년(태종 18) 전라도수군도절제사(全羅道水軍都節制使)가 되었다.[『태종실록』태종 18년 6월 2일]
조선 세종 시대 활동
1419년(세종 1) 병조 참의(參議)를 거쳐서, 전라도도체찰사(全羅道都體察使), 전라도병마 도절제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가 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 1년 4월 17일, 세종 1년 5월 12일, 세종 2년 2월 2일] 1420년(세종 2)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가, 전라도수군도절제사로 임명되었다.[『세종실록』세종 2년 5월 7일, 세종 2년 10월 24일] 이듬해인 1421년(세종 3)에 전라도수군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使)가 되었다.[『세종실록』세종 3년 7월 11일] 1423년(세종 5) 경상우도수군처치사(慶尙右道水軍處置使)를 거쳐서,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가 되었다.[『세종실록』세종 5년 1월 25일] 1424년(세종 6) 진하사(進賀使)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왔다.[『세종실록』세종 6년 12월 25일] 이어 이듬해인 1425년(세종 7)에는 동지총제(同知摠制)로서 사신 원접사(遠接使)가 되었고, 이어 황주선위사(黃州宣慰使), 의주선위사(義州宣慰使)를 역임하였다.[『세종실록』세종 7년 윤7월 5일] 1431년(세종 13)에는 강계절제사(江界節制使)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세종 13년 7월 2일] 이듬해인 1432년(세종 14) 겨울 야인(野人) 4백여 기(騎)가 여연(閭延)의 경내에 침범해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갔는데, 이들을 추격하여 야인에게 붙들린 사람 26명과 말 30필, 소 50마리를 도로 빼앗아 왔으나, 전사자가 13명, 부상자 25명이었다.[『세종실록』세종 14년 12월 9일] 결국 그는 적을 방어하지 못하였다는 죄목으로 1433년(세종 15) 직첩을 삭탈당하고, 고신(告身)을 추탈당하였으나 뒤에 복관되었다.[『세종실록』세종 15년 2월 12일, 세종 15년 5월 21일, 세종 15년 7월 9일]
1454년(단종 2)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88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천성이 본래 탐오(貪汚)하여 염치를 돌보지 않았다.[『태종실록』태종 17년 2월 27일] 재주 있는 유자(儒者)로서 시(詩)도 잘 짓고 글도 잘 지었다. 1424년(세종 6) 북변(北邊)에 여진(女眞)의 침입이 잦으므로 조정에서 경원부(慶源府)를 남쪽 용성(龍城)으로 옮기려 하자 이를 반대, 부령(富寧)에 존속케 하여 국토가 축소되는 것을 막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동문선(東文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