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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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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현공주 |
한글표제 | 경현공주 |
한자표제 | 敬顯公主 |
분야 | 왕족/공주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선조 |
집필자 | 정주영, 김가람 |
봉작 | 경현공주(敬顯公主)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출생 | 1530년(중종 25) |
사망 | 1584년(선조 17)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 |
증조부 | 덕종(德宗) |
조부 | 성종(成宗) |
부 | 중종(中宗) |
모_외조 | 문정왕후(文定王后) |
형제 | (남동생)인종(仁宗) (언니)효혜공주(孝惠公主),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 (여동생)인순공주(仁順公主) |
자녀 | (1남)신사정(申士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현공주(敬顯公主)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中宗實錄)』 36년 3월 7일, 『중종실록』 36년 9월 22일, 『명종실록』 2년 1월 15일, 『명종실록』 3년 11월 1일, 『명종실록』 4년 7월 14일, 『명종실록』 7년 12월 10일, 『명종실록』 7년 12월 28일, 『명종실록』 8년 10월 9일, 『명종실록』 9년 1월 10일, 『명종실록』 9년 1월 10일, 『명종실록』 11년 7월 2일, 『명종실록』 11년 7월 3일, 『명종실록』 11년 7월 4일, 『명종실록』 12년 2월 14일, 『명종실록』 13년 6월 15일, 『선조실록』 1년 4월 24일, 『선조실록』 1년 6월 14일, 『선조실록』 1년 8월 8일 |
총론
[1530년(중종 25)~1584년(선조 17) = 55세]. 조선 제11대 왕인 중중(中宗)의 딸로 공주. 어머니는 중종의 계비(繼妃)로,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윤지임(尹之任)의 딸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친동생은 제13대 왕인 명종(明宗)이며, 배다른 오빠로는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아들인 제12대 왕 인종(仁宗)이 있다. 친언니는 효혜공주(孝惠公主),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이며, 친여동생은 인순공주(仁順公主)이다. 부마는 고령 신씨(高靈申氏)로 영천위(靈川尉)신의(申檥)와 혼인하였다.
출생 및 혼인 생활
1530년(중종 25) 중종과 문정왕후의 셋째 딸로 태어난 경현공주(敬顯公主)는 공주로는 넷째 공주였으며, 8세가 되던 1537년(중종 32) 경현공주로 봉해졌다.[『팔곡집(八谷集)』 권3 「유명조선국경현공주묘지명(有明朝鮮國敬顯公主墓誌銘)」] 1541년(중종 36) 3월 사헌부(司憲府)에서는 경현공주의 집이 완성이 되자마자 바로 옛 집을 개조하라는 중종의 명에 백성들이 고달프다며 반대하였으나, 중종은 원래의 뜻을 꺽지 않았다.(『중종실록(中宗實錄)』 36년 3월 7일) 이어 그해 9월 모든 공주와 군(君) 가운데서 길례를 행해야 하는 경현공주와 봉성군(鳳城君)의 집을 먼저 공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과 공주, 옹주의 집들을 화려하게 짓는 바람에 백성들의 노역이 심하다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6년 9월 22일) 그해 경현공주는 신수경(申秀涇)의 아들 신의와 혼인하였고, 부마가 된 신의는 영천위에 봉해졌다.[『팔곡집』 권3 「유명조선국경현공주묘지명」] 그리고 1546년(명종 1) 경현공주와 신의 사이에서 아들 신사정(申士楨)이 태어났다.
그러나 경현공주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가 않았다. 남편 신의가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경우가 많았다.(『명종실록』 2년 1월 15일) 결국 통천(通川)으로 귀양을 보내는 방법 등을 통해 그 행동을 제재하고자 하였으나, 신의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하였다.(『명종실록』 3년 11월 1일),(『명종실록』 4년 7월 14일),(『명종실록』 7년 12월 10일) 결국 1552년(명종 7) 신의는 고신(告身)을 빼앗기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신의의 행동은 나아지지 않았다.(『명종실록』 7년 12월 28일) 계속하여 기생집에 들락거리며 문제를 일으켰으며, 그리하여 경현공주의 집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기까지 하였다.(『명종실록』 8년 10월 9일),(『명종실록』 9년 1월 10일) 그러나 신의는 경현공주의 집에 가서 경현공주의 의복을 기생에게 가져다주고, 경현공주 앞에서 계집종을 희롱하거나, 경현공주의 집으로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 간음을 하는 등 계속하여 문제를 일으켰다.(『명종실록』 9년 1월 10일),(『명종실록』 11년 7월 2일) 이에 명종은 사헌부의 주장에 따라 신의를 통천으로 위리안치 시켰지만, 신의가 이곳에서도 계속하여 문제를 일으킴에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 자진(自盡)하게 하였으나, 신의는 이것마저도 듣지 않았다.(『명종실록』 11년 7월 3일),(『명종실록』 11년 7월 4일),(『명종실록』 12년 2월 14일),(『명종실록』 13년 6월 15일) 이후 신의는 서울로 돌아와서 또 문제를 일으켰다. 경현공주를 심하게 박대하여 의복과 음식을 넉넉하게 대주지 않고, 경현공주를 봉양한다는 것을 문제 삼아 며느리를 쫓아내기도 하였다.(『선조실록』 1년 4월 24일) 결국 선조(宣祖) 또한 그를 보성으로 위리안치 시켰다.(『선조실록』 1년 6월 14일)
한편 경현공주는 남편뿐만 아니라, 아들 신사정 때문에도 마음 고생을 하였다. 신사정은 문정왕후의 국상(國喪) 기간 또한 기생과 간통하였을 뿐 아니라, 어머니 경현공주와 외할머니 문정왕후의 물건을 간통한 기생에게 가져다주기까지 하였다.[『명종실록』 21년 월 28일 1번째기사] 게다가 아버지 신의와의 관계도 매우 좋지 않아서, 신의가 형벌을 받거나 귀양을 갈 때에도 태연하였는데,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신사정은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선조실록』 1년 8월 8일)
이러한 가정 불화 속에서 화병이 나기도 하였던 경현공주는 1584년(선조 17) 남편 신의가 세상을 떠난 후 그해 8월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팔곡집』 권3 「유명조선국경현공주묘지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광주 치동 목관리에 위치하는데,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이다. 오른 편에는 남편 신의의 묘소가 있다.
경현공주는 신의와의 사이에 1남 신사정을 두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팔곡집(八谷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지두환, 『중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