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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4일 (목) 18:1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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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노포 |
한글표제 | 이노포 |
한자표제 | 吏奴逋 |
상위어 | 포흠(逋欠) |
관련어 | 이포(吏逋), 민포(民逋) |
분야 | 경제/재정/환곡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송찬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노포(吏奴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41년 5월 24일, 『정조실록』 1년 6월 23일 |
환곡 등 국가 부세곡(賦稅穀)을 서리나 관노들이 빌린 후 갚지 않는 행위.
개설
환곡의 포흠이란 환곡을 대여한 후 상환받지 못하여 결손분이 발생한 것을 말하였다. 이 가운데 이포(吏逋) 혹은 이노포는 서리층에 의하여 일어난 포흠이었다. 환곡이 무리하게 운영되면서 빚어진 포흠에 대하여 담당자인 서리의 책임으로 돌려져 이노포가 생겨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서리층이 부세 수취의 실무자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포흠한 것이었다.
내용 및 특징
환곡의 포흠은 주체에 따라 이포와 민포(民逋)로 나뉘었다. 일반적으로 서리에 의한 포흠이라는 뜻으로 이포라고 부르지만, 서리뿐 아니라 관노(官奴) 등의 포흠도 포함되기 때문에 이노포라고도 불렀다.
포흠의 규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커졌다. 환곡을 운영하는 데에 실제 창고에는 없고 문서로만 존재하는 허류(虛留)가 늘어나면서 환곡의 분급이 폐지되었는데,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이노포에 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포흠의 비율은 이노포가 민포보다 훨씬 높았으며, 19세기에 이노포는 거의 전국적인 현상이 되었다.
국가에서는 포흠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였는데, 민포와 이노포를 구분하여 조치하였다. 민포는 환곡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여 마을을 떠나 떠돌거나 흉년이 들어 유민이 발생하여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상환의 조건이 상대적으로 나았다. 그러나 이노포는 서리의 탐학 또는 관 재정의 과용 등으로 일어났다고 보고, 대체로 강경하게 처리하려 하였다. 관련 서리들은 정배를 보내거나 심지어 처형을 시키기도 하였다. 포흠분은 관련자의 친척이 대신 납부하게 하는 족징(族徵)으로 채우도록 하였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1765년(영조 41) 충주 지역의 포흠에 대해서는 포흠을 한 서리 11명을 모두 정배 보냈으나 족징에 대해서는 면제해 주었다. 사헌부에서는 국법으로 용서해 줄 수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영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영조실록』 41년 5월 24일). 반면 1777년(정조 1) 남한산성어사정지검(鄭志儉)이 군량의 이노포를 보고하자 정조는 전후 부윤(府尹)까지 처벌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년 6월 23일).
한편 일정한 기간 내에 포흠된 환곡을 채우는 것, 즉 배봉(排捧)하도록 하는 방법도 이노포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다만 배봉의 기간은 조정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여 책정하였다.
참고문헌
- 송찬섭, 『조선 후기 환곡제 개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 장동표, 「19세기 전반기 서리층의 중간 포흠과 지방 재정」, 『부대사학』 10,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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