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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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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행서 |
한글표제 | 행서 |
한자표제 | 行書 |
상위어 | 서체(書體), 자체(字體) |
하위어 | 진행(眞行), 초행(草行) |
관련어 | 명석서(銘石書), 장정서(章程書), 행압서(行押書)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성인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행서(行書)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3년 7월 6일 |
후한(後漢) 때 발생하여 현재까지 쓰이는 한자체(漢字體)의 하나.
개설
행서(行書)는 해서의 기초 위에서 발생하였으며, 해서와 초서(草書) 중간 정도의 자체이다. 해서보다는 서사 속도가 빠르고, 초서보다는 글자를 알아보기 쉬운 장점이 있다. 행서에서 ‘행(行)’은 ‘지나가다’ 혹은 ‘달려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행서는 해서를 조금 간략화하고 빠르게 쓴 자체를 말한다. 청(淸)나라송조(宋曹)는 행서의 특징을 ‘진서(眞書)도 초서도 아니며, 방(方)을 없애고 원(圓)을 따르며, 해서와 예서보다 빠르게 쓰는 서체’로 규정하였다.
내용 및 특징
행서는 크게 진행(眞行)과 초행(草行)으로 구분된다. 진행은 진서에 가깝지만 진서보다는 딱딱하지 않고, 초행은 초서에 가깝지만 초서보다는 천천히 쓰는 서체를 말한다.
행서의 기원에는 2가지 설이 있다. 첫째, 장회관(張懷瓘)의 『서단(書斷)』에 따르면 후한의 유덕승(劉德昇)이 만들었으며, 정서(正書)에서 간략화하고 편한 데 힘써 행서로 칭하였다고 하였다. 행서를 정서, 즉 해서에서 파생된 자체로 본 것이다. 둘째, 왕승건(王僧虔)은 『고래능서인명(古來能書人名)』에서 위(魏)나라종요(鍾繇)의 글씨는 명석서(銘石書), 장정서(章程書), 행압서(行押書) 3체가 있었는데, 행서라는 용어는 행압서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행서의 발생을 종요로부터 찾은 견해이다. 이후 왕희지(王羲之)에 이르러 실용성과 예술성의 양면에서 완성의 단계에 이르렀고, 왕희지를 비조(鼻祖)로 한 남파(南派)의 행서 예술이 성립되었다.
행서라는 명칭은 진(晉)나라위항(衛恒)의 『사체서세(四體書勢)』에 처음 보이는데, ‘위초(魏初)의 종요와 호소(胡昭) 두 사람이 행서법(行書法)을 썼는데, 모두 유덕승을 배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장회관은 『서의(書議)』에서 행서는 초서도, 진서도 아니면서, 진서를 겸한 것을 ‘진행’, 초서를 겸한 것을 ‘행초(行草)’로 규정하였다. 한편 행서의 필법적 특징에 대해 명(明)나라풍방(豐坊)은 『서결(書訣)』에서 “붓이 흘러가면서 멈추지 않고, 종이에 쓰면서 새기듯 쓰지 않고, 가볍게 구르면서 무겁게 눌러 마치 수류운행(水流雲行)과 같다. 조금도 끊어지지 않아 생의(生意)가 영원하다.”고 묘사하였다.
중국에서는 역대의 행서 필적 가운데 뛰어난 3점을 꼽았다. 우선 진나라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를 꼽는데, ‘용이 천문(天門)을 오르고, 범이 봉궐(鳳闕)에 누운 형상’이란 극찬을 받았으며, 아사(雅士)·초인(超人)의 풍격을 지녔다고 평가되었다. 둘째, 당(唐)나라안진경(顔眞卿)의 굳세고 분방한 「제질문고(祭侄文稿)」를 꼽는데, 성철(聖哲)·현달(賢達)의 풍격을 지녔다고 평가되었다. 셋째, 송(宋)나라소식(蘇軾)의 「황주한식첩(黃州寒食帖)」이 학사(學士)·제자(才子)의 풍격으로 꼽힌다. 소식과 함께 황정견(黃庭堅)·미불(米芾)·채양(蔡襄) 등이 송대(宋代)의 대표적 행서 명가로 꼽히며, 원대(元代)에는 조맹부(趙孟頫)·선우추(鮮于樞)·강리노노(康里巎巎) 등이 있다. 또 명대(明代)의 축윤명(祝允明)·문징명(文徵明)·동기창(董其昌)·왕탁(王鐸), 청대(清代)의 유용(劉墉)·하소기(何紹基) 등 명가의 작품이 적지 않게 전하며, 역대 한국에서도 학습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국에서는 고려말로부터 당의 오도자(吳道子), 송의 이공린(李公麟)·소식, 원의 조맹부 등의 행서가 묵적을 통해 수용되었다. 한편 고려에서는 왕희지의 행서풍이 근간을 이루었는데, 고려의 명필 탄연(坦然)이 왕희지의 서법에서 출발했다든지, 왕희지를 극히 숭상한 당태종(太宗)의 「온천명(溫泉銘)」으로 집자한 흥법사진공대사비명(興法寺眞空大師碑銘), 왕희지 필적으로 집자한 인각사보각국사백월정조탑비명(麟角寺普覺國師白月靜照塔碑銘)이 세워지는 등 진당고풍(晉唐古風)의 전통이 지속되었다. 특히 집자비(集字碑)의 유행은 우리나라 명필에게도 미쳐 김생(金生)의 필적으로 집자한 태자사낭공대사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栖雲塔碑), 탄연과 왕희지 필적으로 함께 집자한 직지사대장당기비(直旨寺大藏堂記碑)가 세워지기도 했다.
조선초기에는 고대의 전범(典範)으로서의 왕희지 서풍과 근대 복고로서의 조맹부 서풍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인데, 세조가 사정당(思政堂)에서 종친과 대신을 면대한 뒤 왕희지·조맹부의 서첩을 꺼내면서 ‘첩을 널리 반포하면 선서자(善書者)가 있게 될 것’(『세조실록』 3년 7월 6일)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중국 명필의 행서를 다수 간행한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조선시대 행서의 명가로는 이용(李瑢), 한호(韓濩), 윤순(尹淳), 이광사(李匡師) 등을 꼽는다.
참고문헌
- 梁披雲 主編, 『中國書法大辭典』, 미술문화원 영인본, 1985.
- 이완우, 「朝鮮 前期의 書論 硏究」, 『미술사학연구』 240, 한국미술사학회, 2003.
- 이완우, 「고려시대 글씨와 宋·元代 書風」, 『高麗美術의 對外 交涉』, 한국미술사학회, 예경,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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